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5)
'허니문 피리어드(honeymoon period)', 혹은 '밀월기'는 신혼여행처럼 설렘과 달콤함으로 가득한 시기를 뜻한다. 피스보트 경험에서 그 '허니문'은 딱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처음 승선했을 때는 모든 게 신선했다. 크루즈,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크루즈 안의 다양한 부대시설,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사들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들 서로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마치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신선함은 점점 바래갔고 단조로운 일상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인터넷도 잘 되지 않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 운이 좋으면 돌고래 떼를 구경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진정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단조로움에 적응해 갔다. 어떤 이는 우울해져 집이 그리워했고, 다른 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채 불만을 쏟아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위축되기도 했다. 나 또한 감정의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서서히 피곤과 실망이 밀려왔다.
나의 실망은 기대했던 강연자들에서 시작되었다. 피스보트는 평화에 기여하는 전문가들을 초청해 다양한 강연을 제공한다고 했기에, 나는 그들의 깊이 있는 통찰을 기대했다. 하지만 실상은 너무도 달랐다. 그들의 강연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내용은 얕고 형식에 치우친 것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이력서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능력이 부족한 동료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구글이나 챗GPT에서 정보를 찾는 게 더 나을 정도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몇몇 강연자들이 실수로 초빙된 것이라 생각했지만, 계속되는 실망감은 피할 수 없었다. 당장 내일 강연에 사용할 자료조차 제대호 준비하지 않은 채 강단에 선 강연자들을 보며, 나의 당혹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강연자들이 피스보트의 단골 강연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곤 피스보트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실망시킨 것은 강연자들이 아닌, 한국 승객과 한국어 통역팀에 대한 피스보트의 태도였다. 다른 언어 통역팀은 4명씩 뽑아 배정했는데, 한국 승객이 적다는 이유로 한국어 통역팀은 2명만 배치했다. 문제는 업무량이었다. 타 언어팀과 동일한 수준의 업무를 배정했고, 결국 우리는 다른 팀의 두 배에 달하는 일을 소화해야 했다. 맥주 한 캔으로 마음을 달래며 밤늦게까지 다음날 사용할 강연 자료를 번역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통역팀 리드가 어느 한 밤에 그런 나를 발견하게 되면서 한국어 통역팀의 일을 덜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더 빨리 소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일을 덜어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통역 서비스 부족으로 인해 피해를 본 한국 승객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한국어 통역 서비스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한국 승객들은 다른 승객들처럼 충분한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러한 상황을 오로지 통역 봉사자의 것으로 방치하는 피스보트의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은 날로 커져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여정은 나에게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기대했던 여행의 의미는 사라지고, 시스템 속에서 소모되는 기분만 남았다. 결국,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하선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