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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코끼리

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10)

by 인생퍼즐도사


학살당하고 착취당한 아메리카 원주민들, 노예로 팔려 간 아프리카인들, 반인륜적 핵폭탄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청중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 감정은 심오하고 공감의 연대감을 자아냈다. 무대 위의 강연자는 그들의 목소리로 아픈 과거를 일깨웠고, 수많은 일본 승객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나 또한 원자폭탄 투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 고통이 국경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궁금증 하나. 피스보트가 출항한 지 2달이나 되었는데, 일본인 승객이 가장 많은 배에서 왜 정작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이야기되고 있지 않은 걸까?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그리고 그 피해자의 10%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 그런데도 일본의 원폭 피해는 일본의 고유한 경험으로만 서술되고 있다. 이는 왜일까? 전쟁 없는 평화를 위해 세계를 여행하며 원폭 피해자의 이야기를 알리는 일은 분명 중요한 사명이다. 하지만 승객의 30% 이상이 과거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나라에서 온 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시아 국가들 간의 역사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IMG_8376.JPG 강연자들이 하선할 때 남겨놓는 선내신문 작별 메시지




그 질문은 내 마음속에 거대한 핑크코끼리를 남겼다. 피스보트의 화려한 행사 뒤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 코끼리는, 누구도 거론하고 싶지 않은 주제인 듯했다. 하지만 일본 역사에 대한 진지하고 적극적인 성찰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진정한 연대와 치유를 이룰 수 있을까? 적어도 피스보트 안에서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의 모습은 원폭 피해자들만의 슬픔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사를 직면하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로 나아갈 수 없다. 이 복잡한 감정들이 나를 괴롭히던 어느 날, 나는 결심했다. 이제 이 핑크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대화의 장에서 이 주제를 꼭 끌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아픔이 서로에게 닿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결심과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과연 내 목소리가 들릴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에게 어떤 결과가 닥칠지 알 수 없었다. 혹여나 피스보트에서 쫓겨나면 어떡하지? 친하게 지내던 승객들이 나를 멀리하면 어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임을 감당하기로 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이 내 성장의 일부라는 것을 믿었다.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순간이 진정한 연대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는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진실을 꺼내는 용기로 나아갈 때임을 느꼈다.


내가 먼저 시작하면, 어쩌면 누군가는 응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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