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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역사의 조각들

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9)

by 인생퍼즐도사


유럽의 한 교육 연구소에서 역사 교과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에카이드의 강연은 내가 얼마나 ‘반쪽짜리 역사’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시작은 세계대전 이야기였다.


독일과 일본, 두 전범국의 역사적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에카이드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내가 알고 있던 세계대전의 역사뿐 아니라, 내가 갖고 있던 역사 인식 자체를 흔들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이 가장 많이 일어난 폴란드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일반적으로 폴란드는 ‘전쟁 피해국’으로만 여겨지지만, 그 이면에는 폴란드가 유대인을 색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폴란드에서 발생한 많은 사상자는 단순한 피해의 수치로만 읽힐 수 없는 이유였다. ‘가해자’는 독일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동시에 독일 내에도 양심에 따라 유대인을 돕다 희생된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20230312502107.jpg 나치체제의 잔혹상을 독일 사회에 고발하며 저항을 촉발한 단체, 백장미단의 처형당한 단원 6명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맥락은 단순히 ‘전범국’과 ‘피해국’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 안에서는 쉽게 간과된다. 에카이드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며, 교과서 또한 논문처럼 피어리뷰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성찰하기 위한 중요한 메시지였다.



강연을 들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배운 역사적 사실들이 얼마나 편향적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복잡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는 종종 사라지거나 축소되었음을 깨달았다.


원폭 피해자와의 만남: 숨겨진 고통

에카이드 강연 즈음, 피스보트에서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행사를 주최했다. 그곳에서 원폭 피해 당사자와 후손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특히 원폭 피해 4세인 한국인 참석자의 증언은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에 원폭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원폭 피해는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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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나의 반쪽짜리 역사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내가 받은 교육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세계대전을 끝내고, 일본을 패망시켜 우리가 광복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역사 사건으로만 가르쳤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이면에는 수많은 고통과 희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 중 원폭 피해를 입은 이들은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였다. 슬픔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너무 늦게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일본 패망에만 집중하며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교육하지 않은 우리 교육 시스템에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곡된 역사를 퍼뜨리는 일본을 손가락질하지만, 과연 우리는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가?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역사란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와 경험의 집합체다.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복잡한 맥락 속에서 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앞으로 나는 폭넓고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를 탐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여러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나의 책임임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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