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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Aug 02. 2021

페스코 김밥 만들기

원랜 채식이었으나 그건 어지간해선 안 되겠다


집에서 닭발을 만들어 먹는 나를 두고 혹자는 내가 일 벌이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판단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하고 판단할 수도 있고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셋 다 틀린 추측은 아니다. 나는 내가 관심 있는 일에 한해 일 벌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편이고, 역시나 내가 관심 있는 일에 한정하여 부지런한 사람이며 만드는 음식이 무엇이냐에 따라 요리를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다. 무언가에 관심만 있다면 기꺼이 흔쾌히 시간과 노동력을 투자하지만, 이건 다르게 말하자면 관심이 없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퍽 단순한 사람이지만 인생은 그다지 호락하지만은 않아서 부지런히 일을 벌여가면서까지 요리를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음식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다 그를 충족하는 음식이 닭발이었고 그래서 요리도 하고 글도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만들어 본 이 페스코 김밥 역시 대단히 내 관심을 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인터넷에서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우연찮게 냉면 육수를 활용할 수 있는 여름 요리를 내게 추천하면서부터, 그래서 다음날 마트에서 냉면 육수 3 봉지를 사면서부터, 유튜브가 소개한 그 여름 요리들 중 한 번 해볼 만하겠는데? 싶었던 게 김치말이 국수였던 것부터, 그래서 또 다음날 마트에서 1봉에 3개 들이 오이를 사 오면서부터, 그리하여 2개는 어떻게 열심히 꾸역꾸역 먹어치웠는데 나머지 하나는 냉장고 한 구석에 처박혀 슬슬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지다 채소가 물로 바뀌는 연금술, 상추의 전매특허인 그 엿같은 연금술을 발휘할 기로의 코앞에 놓인 마지막 남은 오이 하나가 기어코 내 눈에 띄어 버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김밥에 오이만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당근도 샀다. 단무지는 굳이 식감 때문이 아니라면 넣을 필요가 없는 재료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조리된 모든 무라는 무는 전부 싫어하기 때문에 이미 오이로 아삭한 식감을 줄 수 있는 김밥에 단무지를 넣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햄은, 이왕 만드는 거 건강하게 해보자 싶어 빼기로 했다. 오이와 당근 외의 재료로는 집에 깡맥(안주 없이 맥주만 조지는 행위)이 부담스러울 때 한 줄씩 까먹으려고 사 둔 맛살이 딱 한 줄 남아있었고, 나름 식단 해보겠다고 사둔 계란도 있었다. 물이 되기 직전의 오이 하나 처리하려고 당근과 김밥김, 채칼, 김발을 샀다.



채칼은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오이와 당근이 아닌 내 손을 베기에 딱 좋게 생겼다. 부들부들 거리며 오이와 당근을 썰었다. 그런데 막상 채로 썰어보니 오이 양이 턱없이 부족한 것 아닌가. 이왕 먹을 거 배 터지게는 먹어도 아쉬움이 남게 먹는 걸 선호하지 않는 나는 어쩌자고 1봉에 3개 들이 오이를 또 사 오고 말았다. 총 오이 2개와 당근 1개를 채로 썰었다. 들어가는 재료가 더 풍부했다면 오이 2개와 당근 1개로 김밥을 서너 줄은 만들 수 있을 텐데, 나는 거의 오이와 당근만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김밥을 만들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만큼의 양으로 김밥 2줄이 나왔다.


오이 1개 양이 이렇게 적다니.


기름을 둘러 당근을 볶은 뒤 소금 간을 했고, 오이는 면포에 담아 물기를 쪽 뺐다. 지단도 부쳤다. 예쁜 모양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주 보기 좋게 찢어진 지단이 완성되었고, 어차피 썰어버릴 것, 갖다 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먹을 것 잽싸게 더 잘게 잘라버렸다. 첫 번째 김밥엔 슬라이스 치즈 2장을 나란히 깔고, 그 위에 지단을 올리고 오이와 당근을 아주 한가득 올려 말았고, 두 번째 김밥엔 지단 약간, 오이와 당근 약간, 맛살 한 줄, 김치말이 국수 하려고 참기름에 조물조물 버무려뒀던 김치를 약간 올렸다. 기껏 사둔 김발은 쓰지도 않고 손으로 성공적으로 말았다. 다 만든 김밥이 써는 단계에서 터져버리는 것은 참으로 허탈한 일이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칼을 한 번 갈았다. 아, 김밥 표면에 참기름도 발랐다. 유튜브 보니까 솔로 간질간질 예쁘게 바르던데 그런 솔 같은 것 없어서 손에 참기름을 부어 김밥 위를 오일 마사지하듯 왔다 갔다 거렸다. 뭐, 바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대충 봐도 당근 한 바가지


솔직히 처음 썬 김밥의 단면을 봤을 때, 당근을 너무 때려 넣어서 새빨갛기만 한 모습에 조금은 식욕이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거의 공복이었고, 재료 손질부터 약 1시간이나 걸려 만든 김밥이었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이걸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음 그런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까? 생각보다 맛있었다. 소금 간 이외에는 간을 하지 않았고 소금 간마저도 슴슴하게 했기 때문에 슬라이스 치즈를 넣은 김밥에선 치즈의 고소한 맛이 충분히 느껴져 좋았고, 참기름에 버무린 김치를 넣은 김밥은 아삭한 오이와 김치의 식감이 잘 어우러져 샐러드를 먹는 듯 상큼해서 좋았다. 햄이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김밥이었다. 다음날은 닭가슴살 소세지를 넣어 만들었다. 밥 대신 수분을 날린 컬리 플라워 라이스를 넣어서도 만들었다.(이건 컬리 플라워 라이스 특성상 찰기가 없기 때문에 조금은 비추)


생각보다 정말 맛있다.
닭가슴살 소세지를 넣은 김밥. 역시나 정말 맛있다.


3일을 연달아 페스코 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고소하게 버무린 시금치를 넣어도 맛있을 것 같고, 아님 볶은 당근을 참기름에 살짝 무쳐 넣어도, 어묵을 매콤하게 볶아서 넣어도, 기름기 쪽 뺀 참치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넣어도, 메추리알 장조림을 넣어도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김밥김과 오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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