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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Aug 16. 2022

마약 카르텔의 도시인 줄로만 알았던 마닐라 여행

과연 오늘 끝을 낼 수 있을 것인가


동생은 필리핀에 사는 남자와 사귄다. 필리핀 사람은 아니고 그냥 필리핀과 연고가 깊은, 동생을 만나러 겨울에 한국에 오면서 처음으로 겨울 자켓을 산 한국사람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만 거의 10번도 넘게 동생은 서울과 마닐라를 왔다 갔다 했다. 금요일 퇴근 후 마닐라에 가서 월요일 새벽에 서울에 떨어진 뒤 출근을 하기도 했다.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 아무튼 그런 동생이 이제 마닐라에 취직을 해 떠났다. 그리고 나는 어쩌다 보니 5일간의 자유 시간이 생겼다. 마음의 고향 방콕에 가려다가 이왕 동남아 갈 것 동생이 어떻게 사는지도 볼 겸 마닐라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필리핀에 대한 내 인식은 썩 좋지 않았다. 한 번은 대체 왜 유독 많은 동남아 국가 중 필리핀에 대해서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가본 적도 없고 제대로 찾아본 적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마음 한 구석에 가득한 이 부정적인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코피노 이슈 때문에? 나는 내 가족, 친구 이외에는 그다지 타인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코피노 이슈만으로 인해 필리핀에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품게 된 것이라면 나는 그야말로 지극히 인류애가 충만한 인간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아무래도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또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치안 때문인가? 그렇게 따지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방콕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다. 모르겠다. 동생이 마닐라를 오가기 시작하면서 마닐라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을 때 장총을 든 가드가 쇼핑몰 입구마다 있다는 글을 읽었고, 이에 동생에게 장총을 든 가드가 쇼핑몰 입구마다 있다는 게 사실이냐, 그런데도 마닐라가 좋으냐고 물었을 때 장총까지는 모르겠고 총을 소지한 가드가 쇼핑몰 입구마다 있긴 하다, 그 총으로 나를 쏘는 게 아니고 필요시 그 총으로 사람들을 말 그대로 가드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전하게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하, 총을 보고 되려 안심할 수 있는 관점도 존재할 수 있구나,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평생 마닐라에 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동생은 필리핀에 아예 살겠다고 가버렸고, 이렇게까지 진지할 일이라면 그깟 다짐이 대수일까. 그래, 시간도 생겼는데. 대뜸 항공권을 질러버렸다. 코로나로 항공권 가격이 너무나 오른 관계로 수하물이 포함되지 않은 티켓으로 구매했다. 동생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화장품을 챙길 필요도, 고데기라던지 수건, 위생 용품 등등을 챙길 필요도 없어서 딱히 수하물 불포함 옵션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 동생도 몇 번이고 몸만 오라고 했다. 나는 말 그대로 원피스 두 세벌과 동생이 한국에서 가져다주길 부탁한 물건들, 교통카드와 약간의 현금만을 챙겨 공항으로 갔다. 당시의 남자 친구는 나보고 해외에 가는 게 아니라 어디 바닷가에 마실 가는 사람 같다고 했다.


7월 30일 마닐라행 항공권을 7월 초에 구매했다. 이런 뭣 같은 회사라느니 내가 드러워서 참는다느니 하는 궁시렁을 한 173번쯤 대고 나니 출발일이 되었다. 나는 동생 하나만 믿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아무런 준비 역시 하지 않았다. 고작 내가 한 것이라고는 마닐라에 가서 입을 원피스를 두 벌 더 주문했다가 하나는 핏이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는 불량 이어 또 성질을 내며 반품한 것뿐. 공항철도 안에서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지금 경기도 파주 어드매에 가는 것도 아니고 장총을 든 가드가, 아니 장총까지는 아니더라도 총을 소지한 가드가 쇼핑몰 입구마다 있다는 나라에 가면서 호텔도 예약하지 않았고, 유심도 구매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로소 머릿속 인지의 공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순탄히 동생을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한 30초 정도 불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또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나 공항철도다, 부럽지, 3년 만에 해외 간다, 면세 골라줘 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코로나 전에도 공항 체크인 줄이 이렇게 길었던가? 내가 구매한 항공권은 세부퍼시픽이었는데 이곳은 저가 항공사이어서 그런지 셀프 체크인 기기를 두지 않았다. mz세대에 속하는 나이이지만 한참 뒤처지는 나도 셀프 체크인 기기쯤은 이용할 수 있는데 아예 옵션마저 주지 않다니. 괜히 분했다. 체크인을 위해 줄을 섰다. 캐리어를 바리바리 가지고 온 사람들 사이에서 부칠 짐 하나 없이 비행기 티켓만 수령하면 그만인 나는 또 한 번 분했다. 나는 티켓만 받으면 되는데. 셀프 체크인 기기만 뒀어도 면세점 더 볼 수 있는데.


줄어들지 않는 체크인 줄을 바라보며 씩씩대다가 뭐 어쩌겠냐며 체념 후 친구들에게 또다시 나 공항이다, 부럽지 하며 깔깔대던 나는 또 한 번 한층 업그레이드된 불안감을 느꼈다. 내 앞뒤 옆에서 들려오는 따갈로그어 대화 소리. 어느 날 동생과 가방을 사러 갔을 때 동생이 아, 이거 너무 귀엽다. 그런데 지퍼가 없어서 필리핀에서는 못 들 것 같아. 하며 내려뒀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동생은 필리핀에서 지갑을 털린 경험이 있다. 내가 매고 있던 가방은, 내가 손수 코바늘로 만든 가방은 당연히 지퍼 같은 화려한 것은 없었다. 이전에 사귀었던 태국인 남자 친구가 내가 가방 지퍼를 열고 다닐 때마다 기겁을 하면서 지퍼를 잠가주고, 나에게 제발 지퍼 좀 잠그고 다니라고 사정을 했던 것과, 최근에 봤던 범죄 도시 2 역시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내 앞뒤 옆에서 따갈로그어로 대화를 나누는 필리핀 분들은 결코(아마도) 내 가방 따위에 관심이 없었을 확률이 높겠지만, 이미 범죄 도시 2에서 손석구가 부잣집 아들래미를 죽인 후 부모에게 문자 전송하는 부분까지 떠올려버린 나는 멘붕에 빠져버렸다. 동생에게 전화를 해 이제라도 나 집에 갈까, 내 돈 내고 범죄 도시 2 찍는 것 아니냐, 내 가방에 심지어 지퍼도 없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동생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비행기나 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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