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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연 Mar 27. 2022

겨울 같은 봄을 맞으며

우리 봄이 오기 전에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전보다 한결 온화해졌고

전과 같은 시각에도 그리 어둡지 않음이 문득문득 느껴진다.

호숫가의 살얼음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하나 둘 두꺼운 아우터 대신 코트를 걸친다.     


아아,

봄이다.

올해도 봄이 왔다.     


스물두 번째 봄을 맞으며

지나간 나의 계절과 다가올 계절을 생각한다.

인간의 생애를 나이대별로 나눠 계절과 대응시킨 것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최초로 한 발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열일곱의 나는 웃기게도 나이로 따지면 스무 살까지가 인생의 봄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꽃다운 나이인 열일곱, 누가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이미 지금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연한 봄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봄이 이제 저물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아쉬워하지도, 불평하지도 않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충만히 누리려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십 대가 되면 내 인생은 좀 더 뜨겁고 단단하게 영글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열일곱의 겨울이 찾아왔고

신축 강당에서 입시 설명회가 한창이던 어느 캄캄한 밤에

내 가장 찬란한 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다 바쳐 좋아한 사람이 떠나갔음을 들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쥐어짜듯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그 겨울밤

그 애를 좋아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지도, 몇 날 며칠을 우울해하지도 않았다.

원래 유달리 애틋하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설마 꿈에 한번 나오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저 나의 시간 속에서 무언가 영구히 사라졌음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평생 채우지 못한 채로 남겨두게 되리라는 것도.

그렇게 열여덟이 되었다.     


계절은 돌고 다시 봄이 찾아왔는데 왜인지 여전히 추웠다.

더 이상 눈을 뜨면 그 애가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애가 아닌 다른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차서,

그 생각들에 잠식되다가, 침전하다가, 끝끝내 익사할 것만 같아서

내게 닥쳐온 계절이 너무 차갑고 매워서 봄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지독히도 시린 겨울이라 생각했다.

이 바람이 그치고 계절이 바뀌면, 나도 그렇게 피어날 줄 알았다.    

 

차라리 매섭게 몰아치며 나를 사정없이 뒤흔들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그런 바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낮아진 기온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오를 줄을 모른다.

나이 앞자리가 바뀐 지금 와서 보니 그건 그냥 추운 봄이었다.     


때때로 이 온도가 싫지만은 않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

투명하다 못해 시린 공기가 빈틈없이 나를 채워

내 안 가장 깊은 곳,

한때 뭔가로 가득 차있었다가 지금은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곳까지 구석구석 서늘해지는 게 좋다.   

  

내 체온이 섞여 미지근해진 공기를 뱉어내면

길게 뿜어져 나오다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는 입김이 좋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끈적하게 들러붙은 한기는 가시질 않는다.      


세상은 겨울의 한파를 견디어내고 나면

동트는 새벽처럼 끝끝내 따스함으로 물드는데

아직도 나는 이 계절 속에 고여 있다.

조금 기온이 오르다가, 오르는 듯하다가, 진동하는 진자처럼 다시 돌아온다.     


어쩌면 열일곱의 그 해가 저물며, 그 애와 함께 내 가장 따스했던 봄도 같이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매년 봄을 기다리며 아직도 그 애가 남긴 노래를 듣는다.

아니, 내 봄을 듣는다.     


그 애는 더 이상 없는데  나는 아직 여기 살아 있다.

살아서 기어코 올해도 봄을 본다.

어딘지 모르게 춥고 시린 겨울 같은 봄을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 낸다.


왜 그 애는 봄이 찾아와 따뜻해지는 게 싫다고 했을까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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