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이제껏 병원을 갔던 날 둘 중에 이처럼 긴장됐던 순간이 있었을까.
MRI 결과를 들으러 가는 길나는 혹이나 다른 이상이 발견되는 건 아닌 지하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오늘날이 흐린 것은 앞으로의 운명을 의미하는 건가, 차가 막히는 것도 주문한 샌드위치가 늦게 나오는것도다 앞으로를 위한 복선인 건가. 이처럼 병원까지 도착하는 동안 별의별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조금 빨리 병원에 도착하였다. 평소와 같이 마음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래층 카페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셨을텐데입이타들어가는 거 같았지만 카페까지 내려갈 기력이 없었다. 하필 이런 날에 책도 안 가져와서 그저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던 중에 남편이 장난을 걸어왔다.
“하지 마 사람 긴장한 거 안 보여?”
긴장한 탓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매섭게 말해버렸다.
“미안해. 근데 나도 긴장돼서 그랬어”
남편 또한 꽤나 긴장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큰 병원을 와 본 적이 없었다. 건강검진은 해봤지만 이렇게 병이 있어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듣는 건 그 또한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던 것이다.
생각이 짧았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고 나만 힘든 것처럼 굴었다. 나의 불안감을 오로지 그에게만 내뱉었다. 배려심이 부족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남편은 괜찮다며 또 내 손을 잡는다. 남편과 만나오고 결혼해서 지금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의 응석을 이처럼 묵묵히 받아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미안함과 고마움에 멋쩍어하고 있었는데 타이밍 좋게 내 이름이 불렸다.
오히려 진료실에 들어가니 차분해졌다. 이제 곧 결과를 알 수 있어서 그런지 조바심은 사라졌다. 그저 묵묵히 선생님을 기다릴 뿐.
그러나 이제 남편이 좌불안석이다. 자꾸 7살 아이처럼 선생님 책상에 있는 자궁모형을 만져대고 온 진료실을 다 훑어본다. 자궁 모형을 처음 봐서 그런지 굉장히 신기해하더군. 일본이나 한국이나 성교육은 엉망진창인가 보다.
그러고 있는 사이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같이 MRI 결과를 확인했다. 엑스레이 사진과 달리 흑백이긴 하나 정말 적나라하게 나의 장기들이 비치고 있었다.
자궁근종의 크기는 9.67cm. 10cm는 넘지 않았군. 그 외의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근종 때문에 자궁이 거대해져 주변 장기와 허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허리 안 아팠냐고 물으며 이 정도면 디스크가 올 수도 있다고... 이제 나의 변명 타임. 가끔 허리가 아팠지만 자세가 안 좋아서 그런 건 줄 알았고 생리할 때가 되면 정말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다고 말했다. 그걸 듣고 선생님은 생리할 때는 자궁이 더 커지니 정말 끊어지기 직전까지 자궁이 허리를 압박했을 거라고. 미안하다 허리야... 그렇게 됐다... 못난 주인 만나서...
문제는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검사 결과를 보고 내가 가장 미안하게 느낀 건 방광이었다. 방광이 자궁에 눌려 거의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더라. 남편도 놀라고선 생님도 놀라고 나는 너무 놀라 헛웃음이 나왔다.(하나도 안 웃김) 커피를 많이 마셔서 이뇨작용이 활발해 그저 화장실을 자주 간 줄 알았는데 보고 나니 방광이 눌려있어서 이건 자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방광 용케 안 터지고 잘 버텨주고 있었어. 사랑해요 방광님. 고마워요 방광님. 미안해요 방광님. 방. 광. 님!!!
그렇게 내 장기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한 채 진료실을 나와 이제 폐경 유도 주사(a.k.a갱년기 주사)를 맞으러 떠났다. 대학병원에서는 주사를 맞는 것 또한 동네병원과는 달랐다.
1. 각 병동에서 주사를 맞는 곳이 있는 게 아니라 한 곳에서 총괄해서 모든 병동의 환자들이 주사를 맞는다.
2. 주사의 경우 미리 결제를 완료해야 맞을 수 있다.
그렇게 허둥지둥 번호표를 뽑고 주사실로 들어가니 웬걸 정말 많은 사람들이 수액을 맞고 있고 주사를 맞으려 대기하고 있다. 병원에 오면 정말 매번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 느낀다. 다시 내 이름이 불리고 주사에 붙여진 이름표와 내 이름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주사를 맞을 준비를 한다. 시원하게 엉덩이를 깔 생각이었는데 배에 맞으면 된다고 하셔서 머쓱. 그래 내 배는 엉덩이보다 살이 많으니 할 수 있지. 암 그렇고 말고. 예방주사 말고 거의 20년 만에 맞았던 주사는 생각보다 아팠고 양이 많아서 그런지 (12mg) 주사 시간도 체감상 길었던 거 같다. 다 맞고 나서 간호사 선생님이 내 배에 붙여주신 뽀로로 밴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는 귀여운 것들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뽀로로 밴드에 고통 따위 잊어버린 30대 여성. 그리고 다 큰 어른에게도 뽀로로 밴드를 붙여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마음이 또 기쁘고 고맙다. 귀여움은 정말 위대하고 크나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다.
주사를 맞고 나와 남편에게 당장이라도 뽀로로 밴드를 자랑하고 싶었지만 하고 싶은 걸 다 한다면 잡혀간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뽀로로를 모르는 남편에게 뽀로로에 대해서 설명하려니 귀찮긴 했지만 귀여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이로서 10월 초까지 당분간 병원에 올 일이 없으니 병원에 있는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고르러 갔다. 병원이라 해서 케이크나 롤케이크 종류만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스콘에 크로와상, 그리고 정크 빵(고로케, 꽈배기 등등)도 많았다. 나중에 입원했을 때 병원밥 질리면 먹으러 와야지.라고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돌고 몸이 더워졌다. 주사 맞았다고 벌써 시작인 건가.
웰컴 투 갱년기 타임. 나의 갱년기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