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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바라보는 관점 Oct 20. 2024

나는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4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던 그녀와 그녀의 강아지 이야기이다. 

그녀는 강아지 산책을 하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나와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에 대한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나 역시 강아지를 좋아한다. 하지만 난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강아지를 잘 키우는 그녀가 부럽다.    

  


우선은 그녀의 이야기 전에 내 이야기부터 하겠다. 

왜 내가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는지….     


난 강아지를 엄청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내가 살던 집에선 강아지를 키웠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른들은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다.

할머니는 ‘개라면 질색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할머니가 ‘개라면 질색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이해한다. 

하루는 할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시다가 넘어지셨다. 

사실 개가 잘못했다기보다 할머니가 개에게 끌려가 넘어지셨다.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들은 작은 강아지가 아니다. 

일반적 누렁이거나 잡종견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 잔반 처리 역할을 주로 했다. 

할머니가 끌고 나갔던 강아지는 검은색을 포함한 잡종견이었다. 크기는 진돗개만 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녀석 뭔가에 흥분하여 막 달려 나가려다가 할머니를 넘어뜨린 거 같다. 

넘어진 이후부터 그 개는 할머니의 원수가 되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개를 싫어하셨다. 

아빠는 할머니와 어느 날부터 의견이 같아졌다. ‘개는 안돼’라고.


엄마는 ‘호랑이띠가 있는 집에선 강아지가 살 수 없데. 네가 호랑이띠잖아. 그래서 강아지들이 자꾸 죽는 거야’라고 말했다.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말한 것도 이해 간다. 

어릴 때부터 개를 키웠는데 하루는 우리 집 개가 나갔다 와서 죽었다. 당시 개가 목줄을 끊고 가끔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쥐약을 먹고 온 거 같다.

당시는 쥐약을 여기저기 먹을 것과 같이 두었던 거 같다.


마지막 키우던 강아지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어린 시절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날부터 죽은 그날까지의 일들이.


조그만 강아지가 어느 집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작은 강아지가 문 앞에서 낑낑거리며 있었다.

당시는 한밤중이었고, 겨울이었다.

오빠와 함께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오빠와 나는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말했다.

“어떻게 할까?”

“그냥 두면 얼어 죽을 거야”

한밤중으로 우리는 강아지가 나와 있는 집의 초인종을 누를 수는 없었다.

결국, 오빠와 나는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너무 귀여운 강아지를 오빠와 나는 상자 안에 넣고 우유를 따라 주었다.

작은 강아지는 우유를 홀짝홀짝 잘 먹었다. 

갑자기 데리고 온 강아지를 가족들은 버리지 못했다. 

이렇게 이 귀여운 강아지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할머니와 아빠의 반대는 여전했으나 이 녀석의 행동은 사랑을 부르는 것들뿐이었다.

아빠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강아지가 아빠를 따라다니며 꼬리를 흔들면 쓰다듬어 주었다. 

사진: Unsplash의Judi Neumeyer

강아지는 그렇게 우리와 살게 되었고 이름은 ‘깐돌이’라고 지었다.

‘깐돌이’는 항상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람들을 따라다녔다. 

자그마하고 통통한 녀석이 사람을 따라다니니 더 귀여움을 받은 거 같다.


'깐돌이'는 전체적 갈색 털에 검은색이 군데군데 있었다. 

크기는 3킬로 정도로 털이 복스럽게 난 강아지였다. 

특히, 난 ‘깐돌이’를 좋아했다. 

‘깐돌이’이 역시 나를 좋아했다. 내가 집에 오면 나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깐돌이’이와 함께 산으로 돌아다녔다. 

그냥 ‘깐돌이’이와 함께 뛰어다녔다. 

‘깐돌이’와 함께 마루에 누워 자곤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몇 년을 살던 ‘깐돌이’는 언니와 나를 따라 나왔다가 사고를 당했다.

당시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은 유독 ‘깐돌이’가 언니와 나를 따라 나왔다.

당시 언니와 나는 큰 차도를 건너서 마트를 가는 중이었다.

나는 ‘깐돌이’에게 ‘집에 가’ 하면서 혼내며 집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날을 계속 따라왔다. 다른 날은 ‘집에 가’하면 집에 갔었는데…….

난 ‘깐돌이’ 때문에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는 그냥 길을 건넜다. 그 차도는 신호등이 없었다. 

언니는 차가 없을 때 우선 길을 건너갔다.

‘깐돌이’는 차도 중앙에 서서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순간 차가 ‘깐돌이’를 치고 갔다. ‘깐돌이’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나는 ‘깐돌이’에게 달려갔다. 

나는 사고 난 ‘깐돌이’를 안고 울면서 집으로 왔다.

‘내가 안고 갔으면 되었을걸…. 내가 집으로 데려다주고 갔으면 되었을걸….’

죽은 ‘깐돌이’를 안고 후회했다. 


이런저런 후회했던 당시가 지금도 생각난다.

'깐돌이'는 어린 시절 나의 마지막 강아지였다.

그렇게 강아지를 보내고 나서는 다시는 개를 키우지 못했다.

우리 집에 오면 나 때문에 개들이 죽는다고 키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 후 나는 집에서 독립하였다.

난 혼자 살았다.

하지만 처음은 ‘강아지가 외로울 거야’라고 키울 생각을 못했다.

아니 ‘키우면 안 된다’고 하며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큰마음을 먹고 첫 강아지를 분양받아 키우게 되었다.


첫 분양받은 강아지는 아메리카 코카스패니얼이란 종이었다.

혼자 처음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것이다.

어떻게 키우는지도 훈련하는 방법도 몰랐다.

무턱대고 분양받아 왔다.


하지만 초보자 주인은 제대로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다.

난 당시 회사에 다녔다. 강아지는 혼자 집에 오랜 시간 있어야 했다.

나는 이 녀석을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았다. 

역시 혼자 살면서 강아지를 키우면 안 되었다. 


강아지 이름은 ‘코페’였다. ‘코페’는 자주 창밖을 바로 보고 있었다.

내가 산책을 매일 시켜 주지 못하니 창밖만 자주 본 것이다.

결국, 2년도 채 안 된 시점에 난 결정을 내렸다. ‘코페’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기로 했다.

산책을 자주 시킬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보냈다. 


‘코페’과 함께 ‘코페’의 짐을 잔뜩 실어서 보냈다.

하지만 이후 ‘코페’을 데리고 간 사람과 연락이 끊기고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난 보낸 걸 후회했다. ‘잘 키우든 못 키우든 내가 그냥 키울걸’이라고.

‘코페’는 잘살고 있을까? 라며 후회했다. 

살결을 만지고 따듯한 체온을 느끼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게 너무 좋다. 

하지만 이후 나는 강아지를 키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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