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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13. 2024

29. 그놈의 영어

Essay


영어는 이제 필수다. 다시 말하면 여전히 필수다.


교실에 있는 아이들의 개인 사물함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영어교재를 가끔 열어 볼 때가 있다.

 ‘요즘은 도형에 관해 배우고 있구나!’

고사리손으로 비틀 빼틀 붙여 놓은 스티커 정답들이 귀엽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까지만 알아도 칭찬받아 마땅한 바다반 아이들의 교재 안에는 별, 십자가, 마름모, 계란형 등등 다채로운 도형들과 영어 이름들이 들어있다.

꼭 영어수업 시간이 아니어도 오 마이 갓! 오우 노! 를 말하는 아이들. 물론 나는 조기 영어교육에 찬성하는 편이다. 사실 이런 말도 이제 식상하다. 이 안건에 대해 찬반 의견이 팽팽히 갈리고 공식적인 토론이나 신문 칼럼의 주제로 자주 등장했던 것도 먼 옛날이야기가 됐다. 영어조기교육이라는 말이 원시어가 돼버린 당연한 영어조기교육 시대에 살고 있다.      


집에서 출근하는 어린이집까지 걸어서 10분이다.

가는 길에 사립 유치원을 지나고 신호등을 건너 단독 사립어린이집 건물을 지나고 또 다른 사립어린이집 건물을 지나면 내가 일하는 시립ㅇㅇ어린이집에 도착한다. 물론 우리 동네에는 시립어울림어린이집이 한 군데 더 있고 각 아파트 안에도 가정어린이집을 포함해서 크고 작은 어린이집들이 곳곳에 있다.     


입학시즌이 다가오면 치열한 신입생 유치경쟁이 시작된다.

저마다 특별한 프로그램을 어린이집 밖에 걸어서 자랑하고 있고 알록달록 예쁜 그림과 다정한 인사말을 보면서 지나가다 보면 없는 아이도 하나 만들어서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중에서도 ‘매일 영어수업’이라는 플래카드는  단연 부모들의 마음을 흔든다. 거기다가 원어민 교사가 가르친다니! 영어유치원급은 아니지만 우리 귀여운 아이가 인절미 콩고물처럼 노란 머리, 그 안에 숨은 짭쌀떡처럼 흰 피부의 브라이언이나 마이클 또는 줄리아 같은 혀가 저절로 감기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매일 헬로! 하며 손을 흔드는 걸 상상하면 마음은 어느새 입학원서에 사인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놈의 영어가 뭐길래. 우린 이렇게 영어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놈의 영어를 잡으러 나도 아이가 세 살이었을 때 필리핀에 갔었다.

모든 일들이 예상 밖으로 흘러갔기에 어쩔 수 없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기서 이 년을 살았다.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던 그곳 삶은 따로 책을 써도 모자라기에 여기서는 하지 않겠다.      

사실 난 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몰라서 생기는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 당연히 영어를 배우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뭐든 본인이 하고 싶으면 때가 되면 하겠지, 싫으면 말고, 하는 방목형 엄마였다.


필리핀의 강점은 인건비가 턱없이 저렴하다는 거였고 그 덕에 우린 집에서 함께 숙식하는 가정부와 영어교사를 따로 고용해서 함께 살았다. 유난히 한국말이 유창했던 아이는 갑자기 바뀐 낯선 환경과 언어에 적응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 아이도 나도 좀 적응이 된 어느 오후에 나는 아이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했다. 그곳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늦게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땀에 젖지 않게 등에 수건을 접어 넣은 아이들이 보모들과 밖에 나와서 놀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도 그 시간에는 영어교사와 동네 산책을 하거나 아이들과 놀기도 했는데 그날은 내가 아이 손을 잡고 산책을 자청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집들을 구경하면서 만나는 이웃 아이들과 보모들에게도 아는 척을 하며 걷던 중이었다. 머리가 새하얀 한 노인이 정원에서 꽃과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노인이 먼저 손을 흔들며 하이! 륭!이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서로 안면이 있구나 생각했다. 아이도 그 노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내게 말했다.      


“엄마! 인사해, 내 친구야!”    


그곳에 살면서 제일 신기했던 게 바로 이 친구라는 단어의 사용처였다.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신나고 좋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되나 싶었는데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으니 문제도 아니었다. 교재를 펼쳐 놓고 밑줄 그으며 단어를 외우고 V와 F, th 발음을 수없이 연습하고 R을 제대로 굴리는 한국인을 부러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연장반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 중에 하나도 바로 친구라는 두 글자 때문이다.

각 반에서 연장반 교실로 모이는 아이들의 연령은 다양하다. 그래서 형님반에서 온 아이들의 볼멘소리는 끝이 없다.      


“선생님, 얘가 나보고 반말해요”      


이 뜻은 자기보다 어린애가 자기를 오빠나 형 혹은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름 예의와 법도를 중시하는 가정교육을 받음직한 점잖은 교사는 “반말하면 안 되지, 형이라고 불러야 해”라고 다정하게 야단을 치기도 한다.      

3세가 4세나 5세에게, 4세가 5세에게 ‘너’라고 하는 건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지양해야 할 일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이를 무시한 호칭을 하면 당연히 예끼! 이놈! 불호령을 듣는다. 우리는 태어난 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절대 친구 사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제약은 뭐랄까, 동성동본의 결혼이 엄격히 금기시 됐던 시절만큼 뭔가 사람을 엄청 섭섭하게 만든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내 친구를 꼭 같은 나이 안에서 골라야 하다니……. 물론 친한 형이나 언니와 더 끈끈한 우정을 쌓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소중한 사람에게 흔한디 흔한, 하지만 마음에 와서 콕 박히는 그 명료한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나만 슬픈 걸까?      


어린이집 친구들이 오늘 배운 영어 노래를 부르며 신나 하면 난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 영어 말고 형, 언니, 오빠, 누나, 선생님, 원장님, 고양이, 강아지, 거미, 귀뚜라미, 모두모두 친구가 되는 그런 영어를 배우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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