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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30. 2024

27. 천사의 말

Essay


우리 연장반에는 다섯 명의 영아들이 있다.

비슷한 연령이지만 발달 상태나 성격도 다 가지각색이다. 꼭 빨주노초파, 다섯 가지 색이 나란히 누워있는 크레파스를 보는 것 같다.


대소변을 잘 가리고 언어습득력도 빠른 유진이는 시장놀이 할 때 ‘이거 얼마예요’라고 물으면 ‘삼천 구백 원이요’라고 대답한다. 양과 질에 상관없이 무조건 다 삼천 구백 원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나름 흥정도 잘하고 ‘다른 건 없나요?’ 물으면 ‘없어요’라고 말하는 줏대도 있다. 짧은 동요와 율동을 함께 하고 놀이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알려주는 나를 뚱하게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언제까지 할 거예요?”     


잔소리 그만 듣고 빨리 놀고 싶다는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하지만 태는 내지 않고 유진이의 눈초리를 피해 서둘러 잔소리를 마친다.     


유진이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수빈이나 성준이처럼 아직 말이 트이지 않은 친구들도 있다. 이 두 친구는 단짝이다. 수빈이가 가는 곳에 성준이가 있다. 성준이가 노는 곳에 수빈이도 논다.

수빈이가 할 수 있는 말은 본인 이름 수빈이와 사물 이름 몇 가지다. 예를 들어 교실에 있는 강아지 인형을 안으며 ‘수빈, 강아지’라고 말한다. 본인 손에 쥔 놀잇감 앞에 항상 수빈이가 들어간다. 수빈이에 비하면 성준이는 말이 좀 더 더딘 편이다. 그래서 좋으면 웃고 심술 나면 울거나 친구를 때리기도 한다. 같이 놀고 싶으면 손짓을 하며 ‘와’한다.


그런데 성준이와 수빈이가 함께 놀 때 이 둘은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는다. 물론 들리는 소리는 성준이의 ‘와, 짠, 아니’ 정도이고 수빈이의 ‘수빈ㅇㅇㅇ’ 이지만 함께 누웠다가 앉았다가 걷다가 달리고 다투기도 하면서 웃다가 울다가, 그러면서 논다. 이 둘 사이에 언어 말고 어떤 텔레파시 같은 게 작동해서 더 깊고 심오한 대화를 나 모르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웃음, 눈물, 표정으로 할 얘기를 다 하는 수빈이와 성준이는 모두 언어발달센터에 다니고 있다. 또래에 비해 말이 느린 친구들이 의례 겪는 과정이다.      

좀 늦게 트일 뿐이지 때가 되면 다 한다,라는 어르신들의 느긋한 기다림은 지금 세상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남보다 더 잘해도 모자랄 판에 느리다니, 토끼가 뛰고 치타가 달리고 독수리가 곡예비행하는 세상에서 거북이는 환영받지 못하는 걱정거리가 된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사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굿모닝 팝스를 듣는다.

하루를 보람차게, 아니 ‘오늘도 그냥 흘러버린 허송의 날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으로 시작한다. 아침밥을 먹으면서부터 유투브를 켜고 익히 알고 있는 정치 관련 뉴스의 다른 버전을 찾아서 듣고 또 듣는다. 한 프로에 나와 열변을 토한 패널이 다른 프로에 나와 같은 얘기를 반복해도 처음 듣는 얘기처럼 듣는다. 특종이라거나 세상이 금방 어떻게 될 것 같은 헤드라인에 혹해서 오른손 검지의 지문이 닳도록 클릭하며 듣고 싶은 얘기를 듣는다. 오후에 출근하니 대체로 한가한 오전 시간에 친구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고 낄낄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떠는 날도 있다. 하루치의 들을 말과 할 말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뭔가 ‘말’이라고 쓰인 빈 용기를 끝까지 채워야 세상 밖 무인도로 혼자 버려지는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 상황이 심각해지는 건 직장이다.

할 말이 넘치게 만드는 이슈의 제조공장인 어린이집에서 과묵은 형벌이다.

공자, 맹자, 장자는 완전 별로다. 우리 같은 사람의 욱한 감정과 한없이 초라해짐을, 당장 어떻게든 어루만져야 할 화딱지를 과연 공감 할 수 있을까? 이들은 바로 왕따가 되고도 남는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입이 근질거리면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 교사의 품으로 달려가 와락 안기고 싶어 진다. 그리고 몇 마디라도 미주알고주알 불만과 억울함을 좀 더 두툼하게 불려서 얘기하면 사이다 한 컵 들이킨 것처럼 당장은 개운하다. 그리고 ‘오늘 말이 너무 많았구나, 그 말은 하지 말걸’ 바로 후회하고 차라리 혓바닥에 병이라도 나서 말을 적게 하는 게 낮겠다고 자책을 한다. 또 읽어야 할 남의 말은 왜 그리 많은지, 욕심껏 주문해서 쌓아놓은 책은 늘 설레면서도 부담이다.     


필리핀에 가서 2년 정도 체류하며 영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낯선 필리핀 튜터와 떠듬떠듬 공부하면서 기본적인 소통은 유창한 언어 실력과는 크게 상관없음을 배웠다. 영어는 늘지 않아도 시간이 갈수록 친해진 외국인 선생님과 마주 앉으면 그 눈빛만 봐도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말을 못 하면 당연히 답답하겠지만 또 그렇게 많은 말이 꼭 필요한 걸까?

누군가와 소통이 안 된다면 그건 내가 그 사람을 안은 적도 손을 잡은 적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웃음, 눈물, 표정으로 천 개의 단어를 말하는 성준이와 수빈이에게 난 매일 천사의 말을 배운다.

복습과 예습도 필요 없다, 마음이 함께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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