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가 흐르고 단정한 회색의 짧은 털, 그리고 소나무가 빼곡한 숲길처럼 그윽한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가 있었어요. 누구나 돌아볼 미모를 가진 고양이의 이름은 ‘미아’랍니다. 이 이야기는 미아의 일생, 아마 그 한 부분의 이야기예요.
미아는 층고가 낮은 주택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 작은 마을에 살았어요. 이 마을은 팔레트의 작은 칸을 채운 물감처럼 알록달록한 건물의 색채와 파란 하늘 위를 느릿느릿 유영하는 하얀 구름, 그리고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나무의 잎사귀 빛깔로 사계절 내내 오색찬란하게 빛났어요. 아름다운 마을을 더 특별하게 만든 건 마을 사람들이었어요. 이곳에는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까닭에, 항상 이곳저곳에서 따뜻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죠.
미아는 겉보기에 꽤 까칠한 고양이 같아서 이 마을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어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도도한 모습과는 다르게, 미아의 마음속 한편에는 늘 포도알만 한 크기의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미아는 온정이 넘치는 이 마을이 좋았어요. 언제든 사람들의 곁에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마을 사람들은 따뜻한 사랑을 듬뿍 주었거든요. 미아는 이곳저곳 자유롭게 방랑하다 따뜻한 관심이 그리워질 때면 아무 집에나 들러 사람들이 내어주는 달콤한 간식을 먹고, 사람들이 베푸는 따뜻한 손길을 누렸어요. 그렇게 필요한 것들을 누리고는 언제나 그렇듯 미련 없이 쌩-돌아서서 자유를 찾아 걸음을 옮겼어요.
미아는 건강을 위해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고양이였어요. 그래서 낮에는 이곳저곳을 누비며 동네 풀을 뜯어먹고 다녔어요. 미아는 본인 입맛에 맞는 풀을 뜯어먹을 뿐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를 신기하게 여긴 동네 어린아이들은 미아를 ‘풀 뜯어먹는 고양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동네 아이들은 작은 두 손으로 미아를 만지기 위해 미아가 어디에 가든지 항상 그 뒤를 따라다녔어요. 햇살아래 낮잠을 자고 있는 미아를 찾아내 발바닥을 꾹 누르고 도망치거나, 사진 찍는 소리로 미아의 사색을 방해하는 일도 빈번했어요. 미아는 점점 사람들의 일방적이고 지나친 관심이 무겁게 느껴졌어요. 어느 날은 꿈을 꾸었는데, 미아는 어항에 갇혀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어항에 갇힌 미아가 허둥거리다가 어항 속 물을 맛보게 됐는데, 그건 미아의 눈물이었어요. 그 짭조름한 맛에 깜짝 놀라 악몽에서 깨어났죠.
미아는 잠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며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식을 때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아는 현명한 고양이였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뜨거운 관심의 불씨라도, 시간이 쌓이다 보면 차가운 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내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어디가 마땅할까?”
미아는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던 곳들을 떠올려 보았어요.
“공원의 올리브 나무 아래에 숨어 지낼까?”
그곳은 이미 미아가 자주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미아를 찾고 싶으면 가장 먼저 가보는 곳이었어요.
“거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지만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
미아는 다른 곳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어요.
“할아버지 화가의 화실 창문에서 지내볼까?”
미아가 종종 찾는 마을 성당 근처에 화실이 있는데,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는 미아가 찾아오면 따뜻한 우유를 한 그릇 내어주고 그 외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늘 캔버스에 집중을 쏟아내며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열중했거든요. 그곳은 따사로운 볕이 잘 들고, 마당에 예쁜 꽃이 잔뜩 피어있는 그림 같은 곳이었어요. 그리고 매시간이 되면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화실까지 울려 퍼지는데, 그 모든 것들이 미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공간이었어요. 화실의 창문을 떠올리며 행복해진 미아가 잠시 잊었던 것을 떠올린 듯 놀랐어요.
“거긴 안 돼! 지난주부터 할아버지의 손주가 방학을 해서 매일같이 친구들과 놀러 오잖아.”
마땅히 지낼 곳을 생각해 내지 못해 기분이 안 좋아진 미아는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포도밭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미아는 포도밭에 앉아 포도알을 따 먹기 시작했어요. 입안 가득 밀어 넣은 포도가 달콤한 향을 내뿜으며 톡톡 터지자, 미아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미아는 신나게 포도로 배를 불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어요. 그러던 와중에 포도밭 맞은편에 있는 분홍색 주택을 발견했어요.
“자주 오는 포도 밭인데, 왜 저 집을 처음 보는 거 같지? 아주 예쁜 분홍색으로 집을 색칠했구나.”
포도밭에 와서는 항상 포도알을 따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었던 미아이기 때문에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분홍색 집을 이제야 발견했어요. 미아는 포도를 먹으며 넋 놓고 분홍 집을 바라보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예쁜 집이라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좋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먼발치에서 분홍색 집을 살피던 미아는 살금살금 길을 건너 분홍색 집 대문 앞에 섰어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야겠어.”
미아는 곧 만날 분홍 집식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앞발을 얼굴에 가져와 세수했어요. 미아가 대문 앞에 서서 단장하고 있는 사이, 어린 소년이 빨간 자전거를 끌고 마당을 걸어 나왔어요. 소년이 대문 앞에 서서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리고 힘차게 다리를 굴리려는 찰나, 앞에 앉아 있는 회색 고양이를 발견했어요.
미아와 소년의 첫 만남이었어요. 미아를 본 소년은 자전거를 대문에 기대어 세워두고 미아에게 다가왔어요. 소년이 다가오자, 미아는 엉덩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안녕 회색 고양아. 길을 잃었니?”
미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소년을 바라보았어요. 소년은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고양이의 코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어요. 미아는 소년의 냄새를 맡았어요. 소년의 작고 하얀 손에서는 흙냄새와 뒤섞인 달큼한 요구르트 냄새가 났어요. 작은 손을 살포시 미아의 미아에 올려 쓰다듬던 소년은 미아에게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어요.
“이름이 뭐니?”
소년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미아가 ‘풀 뜯어먹는 고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아직 모르는지, 미아에게 이름을 물어보았어요. 미아는 그 점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미아오.”
“이름이 미아구나! 반가워 미아.”
소년이 두 팔을 벌리자, 미아는 소년의 작은 품에 구겨 들어왔어요. 둘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어요.
“엄마! 아빠! 여기 좀 나와 보세요. 이 예쁜 고양이가 우리와 함께 지내고 싶은 모양이에요. 이름은 미아래요.”
소년이 마당 꽃밭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자, 하나 둘 가족들이 나왔어요.
“어머, 회색 고양이잖아?”
제일 먼저 나온 건 소년의 누나였어요. 소년의 누나는 소년보다 키가 훌쩍 컸지만, 얼굴에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역력했어요. 소년의 누나는 동생에게 가까이 다가와 품 안에 있는 고양이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엄마 아빠도 마당으로 나왔어요. 소년의 누나가 조금 더 신이 난 목소리로 다가오는 엄마 아빠에게 “엄마, 아빠! 예쁜 초록 눈을 가진 회색고양이예요.”라고 말했어요.
그날 저녁 분홍 집 가족은 미아에게 마당의 잔디를 내어주고, 푹신푹신한 쿠션을 준비해 주었어요. 그리고 모두가 힘과 애정을 모아 따사로운 볕이 가장 잘 드는 창고에 미아의 이름을 새긴 나무집도 만들어 주었어요.
분홍 집 식구들의 대가 없는 관심과 사랑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안락한 겨울을 보내던 미아는 그냥 이대로 한 곳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가족과 함께 보낸 첫겨울을 분홍 집 식구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지나 보냈어요.
바깥에는 노랫소리 같은 새소리가 들려오고, 가벼운 바람 줄기에는 향기로운 꽃향기가 베여있었어요.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봄이 온 거죠.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누워있던 미아는 코끝을 스치는 봄바람 향기를 맡자, 이곳저곳 자유롭게 거닐며 풀을 뜯어먹던 이전의 자유가 그리워졌어요.
“지금도 행복하지만, 자유롭게 지내던 시절도 정말 좋았지.”
과거의 추억에서 허덕이던 미아는 분홍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식구들이 주말 식사 준비로 분주하던 아침, 미아는 살금살금 집을 나섰어요. 대문 밖으로 나와 들꽃들이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거리를 거닐자 발걸음이 가벼워졌어요.
돌연 미아가 사라지자, 분홍 집 가족들은 슬펐어요. 미아가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커다란 그리움과 걱정만이 가득했죠. 미아가 대문 앞에 서 있던 날부터 미아는 이미 분홍 집 가족들에게 소중한 식구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슬픔을 떨치기 힘들었어요.
아빠는 미아가 바깥에서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엄마는 미아가 바깥에서 치어 죽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누나는 미아가 바깥에서 비를 피하지 못할까 걱정했어요.
소년은 미아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한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걱정할 분홍 집식구들은 마음은 새까맣게 잊은 채, 미아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갔어요. 그렇게 봄이 지나고 온 마을은 푸릇푸릇하게 물들었고, 또 시간이 흐르자 푸릇푸릇했던 마을은 노랗고 붉게 물들었어요. 마을의 새로운 골목을 걷던 미아는 문득 자신이 밟고 있는 입사귀의 촉감이 달라진 것을 느꼈어요.
‘바스락 바스락’
고개를 내려 발아래를 보니, 길가에는 뜨거웠던 여름 햇살이 가로수에 남긴 흔적들이 가득했어요.
“낙엽이구나.”
고개를 숙여 한참을 낙엽만 바라보던 미아는 문득 분홍 집 가족들이 떠올랐어요.
“작년 이맘때였는데, 벌써 1년이 지났구나.”
미아가 사람들로부터 숨을 곳을 찾아 분홍 집에 갔던 것도 벌써 1년이 지난 이야기였어요. 미아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사랑으로 돌봐준 가족들이 그리워졌어요. 하지만 아무런 고별 없이 떠나온 자신이기에 다시 분홍 집에 찾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어요. 미아는 분홍 집 맞은편의 포도밭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맞은편 포도밭에서 분홍 집 가족들이 잘 지내는지 보고 싶었거든요.
포도밭에 선 미아는 길가를 사이에 두고 분홍 집을 바라보고 서 있었어요. 분홍 집은 그대로였어요. 미아가 분홍 집을 보며 즐거웠던 옛 추억들을 떠올리는 사이, 대문이 끼익-소리를 내며 열렸어요. 소년이 걸어 나왔어요. 소년은 건너편에 있는 미아를 한눈에 알아봤어요.
“미아!”
소년의 눈은 토끼처럼 커다래졌어요. 소년은 훌쩍 큰 키로 길을 건너와 미아를 껴안았어요. 분홍 집 가족들은 다시 돌아온 미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저 그리웠던 만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어요. 분홍 집 식구들은 미아에게 곧바로 따뜻한 우유와 먹음직스러운 저녁을 차려주고, 오랜만에 돌아온 미아를 살펴보았어요.
“미아가 바깥에서 잘 챙겨 먹고 다녔나 보구나. 아주 살이 많이 쪘어.”
아빠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어요. 아빠의 말을 들은 누나는 불룩 튀어나온 미아의 배를 보고는 “그러게요. 미아의 배가 정말 불룩해요.”라고 했어요. 말없이 미아를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요.
“미아는 살이 찐 게 아니라, 아무래도 임신한 거 같아요.”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롭게 지내던 미아는 뱃속에 아기 고양이들을 품게 됐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분홍 집 가족들은 더욱더 정성을 쏟아미아를 보살폈어요. 분홍 집 식구들 덕분에 미아는 작년과 같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귀여운 아기 고양이들을 낳았어요. 미아가 낳은 고양이중에는 미아와 똑같이 생긴 아기 고양이도 있었고, 정체 모를 아빠가 어떻게 생긴 고양이인지 추측할 수 있을 만한 고양이도 있었어요.
꿈틀꿈틀 움직이는 작은 고양이들과 함께, 분홍 집은 그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가득한 봄을 맞이하게 됐어요. 분홍 집 식구들은 미아가 피로하지 않도록 아기 고양이들을 함께 돌보는 데 큰 힘을 쏟았어요. 그런 가족들 덕분에 미아는 분홍 집에 들어온 이후로 몸도 마음도 피로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하지만 무슨 탓일까요? 또다시 봄바람이 미아의 코끝을 스치자, 미아는 바깥에 두고 온 자유가 그리워졌어요. 길거리를 거닐며 아무렇게나 뜯어먹던 들풀, 그날그날 낯선 곳에서 늘어지게 자던 낮잠, 새롭게 사귀는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그리워진 미아는 다시 한번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어요. 미아는 아기 고양이들을 분홍 집에 두고 혼자 집을 나섰어요.
분홍 집 가족들은 그렇게 떠난 미아를 탓하지 않았어요. 그저 미아가 행복하고 무탈하게 지내다가 내년 낙엽이 거리를 뒤덮을 때쯤 저번과 같이 돌아와 주길 바라며 기다릴 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