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3.피레네가 날 울리네요

(제1일 차 / 생장 피드 포트 ~ 론세스바예스)

3. 피레네가 날 울리네요

♧ 오늘의 코스

산티아고 순례길 첫 째 날인 오늘(9.24)은 생장피드포트(Saint Jean Pied de Port)를 출발하여 ▷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까지 24.2km를 걸어 오후 3시 반쯤 론세스바예스 (Ronoesvalles)에 도착하였다. 총 걸음 수는 4만 5천 보이고 7시간 이상 걸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호텔의 창밖을 내다보니 교회의 종탑 아래 뜰에 무덤이 내려다보인다. 죽은 자의 공간이 산자의 주거지에 자리 잡은 교회의 마당에 집단적으로 모여 있었다. 귀신들이 밤낮으로 축제를 벌일 것 같다. 우리네 풍습과는 확연하게 달라서 퍽이나 이채롭다. 아침 7시에 투숙객 9명이 호텔 식탁에 둘러앉아서 서로 통성명하고 호텔의 뷔페식 아침 식사를 함께 하며 일정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스스로 세계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나는 애국자가 되어 대한민국 홍보대사 노릇을 했다. 공무원 출신은 누구도 못 말린다.

♧ 나폴레옹 길을 걸었네

순례자들이 쓴 여행기에서 순례길 첫날 코스를 통과하는데 고생을 많이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지레 겁먹고 배낭을 배달시켰다. 생장 시내에 있는 스페인 문을 통과한 후에 150m 정도 걸어가니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가는 길이 ‘나폴레옹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발카를로스 길’이다. 발카롤로스 길은 나폴레옹 길보다 짧은 거리이면서 비교적 평탄하여 걷기 쉬운 길이지만 아름다움은 덜 한 것으로 가이드 북에 적고 있다.

나폴레옹 길은 표고 1400m 올라간 후에는 다시 900m 수준까지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힘은 들지만 풍광은 매우 아름답다고 소문난 길이다. 대부분 순례자들은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나폴레옹 길을 걷고, 늦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눈과 추위 때문에 위험해서 당국이 진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타의에 의하여 ‘발카를로스 길’을 걸어야 한단다.

우리는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나폴레옹 길’을 택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푸르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에서 권장한 길은 아니지만 나폴레옹 길도 처음 가는 길이라 설렘이 앞섰고 두려움은 바로 뒤에서 따라왔다.

“나폴레옹 길”이라는 이름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1805년에 나폴레옹은 영국 넬슨 제독에게 패배하자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포르투갈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1807년의 스페인의 영토를 침공해서 잠시 지배한 역사가 있다. 나폴레옹은 1591년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데 길을 빌려 달라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 책략을 구사했던 일본의 토요도미 히데요시의 수법을 본 딴 거 아닌가 싶었다. 당시 조선이 길을 빌려주지 않자,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이순신 등 장군들을 비롯한 우리의 군인, 의병, 백성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바 있다.

이베리아 전쟁(1807-1814)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점령하려고 벌인 전쟁을 스페인 독립 전쟁(Peninsular War)이라고 부른다. 이베리아 반도의 전쟁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과 관련이 깊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유럽 대륙 전체 국가들에게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전통적인 무역 관계를 유지하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침공하여 대륙 봉쇄령에 동참시키고 싶었다.

그는 1807년 이 길을 통과해 스페인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 군대를 스페인 영토 안으로 들여보냈다. 곧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치적 불안정을 이용해 스페인 왕실을 몰아내고 자신의 동생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구상은 스페인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와 스페인 내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David Gates, 2022).

결국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접수하고 포르투갈을 평정했지만 러시아 원정 때문에 1813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아침 7시에 숙소를 떠난 시간 30분 이후부터 이슬비가 내려 긴장이 고조되었다. 준비해 온 비옷을 꺼내 입고 걸었지만 악천후로 바뀌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피레네의 순례길은 우리네 대관령 고개를 올라가는 정도로 가파를 뿐이라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시야를 가릴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나폴레옹 길에서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며 서로를 격려해 주는 인사말인 “올라( Hola, 안녕하세요?)나”,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를 입버릇처럼 주고받으며 낯선 얼굴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생장으로부터 1시간 30분쯤 오르막길을 걸으니 운토(Hunto)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바(Bar)의 자판기에서 차를 구해 마시면서 몇몇 순례자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기네 국적과 순례 코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오순도순 길을 걸었다.

순례길을 걷는 동양 사람은 한국 사람들만 보일 뿐이라서 뿌듯하다. 순례자들은 휴대폰 카메라로 아름다운 풍광을 찍느라고 정신을 홀라당 빼앗겼다. 유튜브 동영상을 염두에 둔 나는 극성스럽게 사진을 찍느라고 소중한 아내를 피레네 늑대들이 물어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실제로 곳곳에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쫒으려고 산악 보호요원들이 공기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을 찍느라고 내 발걸음이 느려지자 아내는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무엇이 목표이고 수단인지 모르겠다고 못마땅해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대피소이자 숙소인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아내가 느긋한 나를 재촉했다. 보다 빨리 걷지 않으면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구할 수 없으며 재수 없으면 첫날부터 노숙을 할지도 모른다며 나를 겁박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순응하지 않았다.

피레네의 아름다운 풍광은 나의 발걸음을 붙들고 쉬 놓아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혼자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내가 나를 재촉하니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서서히 시들어 가는 예기치 못하는 사태가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위장하기에 바쁠 뿐이다.

운토를 빠져나와 오른쪽 넓은 언덕배기에 갈색으로 물든 고사리 밭이 이어졌다. 수만 평이나 되는 산록에 무성하게 웃자란 고사리가 가을 햇살에 마른 채로 땅 거죽을 갈색으로 덮고 있다. 봄철에 오면 고사리를 꺾어서 나물로 무쳐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해 새봄에 다시 와야 하나? 냉소가 살짝 삐쳐 나온다. 다시 오지 못하고 세상을 등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오싹해진다. 다시 오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리라. 이 말을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데 그럴 분위가 아니다.

3km쯤 더 걸어가자 순례자들의 피난소인 오리손 알베르게가 나타났다. 오리발이 아니고 오리온도 아닌 '오리손'이라는 알베르게에는 침대가 18개뿐이라서 예약이 안 돼 포기했던 숙소였다. 오리손 알베르게 이용자들은 대개 생장에서 전날 오후부터 트레킹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생장에서 걸어온 순례자들이 레스토랑에 들러 여권에 스탬프를 찍은 다음 아침 식사를 하려고 줄을 섰다. 그 줄은 지구사에서 가장 큰 뱀인 아나콘다를 닮았다.

차를 마시는 동안 같은 테이블에 앉은 한국 아가씨한테서 ‘행복론’의 한 토막을 들었다. 오리손 알베르게에 운 좋게 투숙했다는 그녀. 요즘 물사정이 안 좋아 샤워장에서 더운물을 5분간만 공급하더란다. 처음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 비눗물을 다 씻어 내기 전에 더운물이 나오지 않아서 불편했다. 아침에 샤워를 할 때는 5분만 공급하는 뜨거운 물공급을 생각이 나서 3분 만에 샤워를 후다닥 끝내버리고 나머지 2분 동안 유유자적하게 샤워를 마무리했더니 아주 '행복'하더란다. 2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 줄 몰랐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샤워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단다. 행복은 사소한 것에서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했단다. 하지만 나는 논산훈련소 샤워장에서 이미 그 경험을 했던 터라서 그녀의 의견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순례길에서 행복의 전도사인 달마 스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식사나 차를 사 마신 순례자들이 화장실로 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줄이 너무 길었지만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목 20km 이내에는 공중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너도나도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려고 겸손한 자세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화장실이 붐비기 때문에 나는 오리손 알베르게의 노천카페 파라솔 밑에서 언덕 아래 저 멀리 펼쳐지는 풍경을 휴대폰에 담는데 여념이 없었다. 피레네 오리손에는 손(손님)만 있고 발은 없는지 피레네 풍경은 내게 오리발을 내밀지 않았다. 오리손에서 바라보는 피레네의 자태에 넋을 잃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어울리지 않았다.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수십 폭의 동양화를 잇대어 펼쳐놓아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다고 걸음속도가 늦어지는 나에게 아내가 투덜거렸다.

“당신은 내 호위무사로 되라고 했지 이렇게 한 눈 팔라고 데리고 온 줄 아나 봐! 그럴 줄 알았으면 나 혼자 오는 건데 말이야!”

아내가 수시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내가 먼저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던 말을 토로했다.

"무시하라!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서 어릴 때 자주 불렀던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를 흥얼거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고 싶어!”

“사랑하는 자기 님은 어디쯤 계실까?”

옆에서 걷고 있던 아내가 노래 중에 끼어들어 산통을 죄다 깨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님은 옆에 있는 아내가 아니라 청년시절 사귀던 그녀는 '희미한 옛사랑'이라는 사실을 간파해 버린 것 같다. 여자는 현명한 것이 좋지만 아내는 현명하지 않으면 여생이 행복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도 신이 났던지 청년시절 우리들의 심금을 울렸던 탐 존스의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 노래로 나의 ‘님과 함께’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철없는 나는 광속으로 아내 가슴을 파고들어 둘만의 추억을 소환함으로써 '희미한 옛사랑'을 추방해 버렸다. 그 시절 우리는 신촌골 모 극장에서 공연하던 쇼에서 우리나라 가수가 부른 <고향의 푸른 잔디>를 열창하며 춤을 추었다. 휴대폰에서 노래를 검색해서 볼륨을 높여 이중창으로 부르며 피레네 고개를 넘어갔다.

오르막길에 이르자 이슬비가 부슬부슬 뿌리기 시작했다. 30분 전에 벗어버렸던 비옷을 다시 꺼내 입어야 했기에 번잡스럽기 짝이 없다. 순례길 주변 초원에서 말과 소와 야크들이 비를 맞으며 풀을 뜯어먹으며 만들어 내는 워낭소리가 한가롭기 그지없다.

문득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30년을 함께 살아온 소 누렁이는 80세의 최 노인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최 노인이지만 누렁이의 ‘워낭소리’만큼은 들었다. 노인은 어느 날 소의 평균 연령 두 배를 살아온 누렁이의 운명을 맞이한다. 소들은 워낭으로 자기 위치를 알려 주며 산천을 자유로이 누비며 풀을 뜯는다. 워낭은 목장 주와 교신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내 몸에는 워낭 대신 휴대폰에 위치 추적기(GPS)가 나의 위치를 아내에게 타전하며 나의 불찰을 반성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순례길 오르막에서 뜻밖에 잘 생긴 다섯 마리의 돈공들을 만났다. 우리를 마중 나온 줄 알았더니 그들만의 자유로운 외출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뛰쳐나온 돈공들, 메이저, 나폴레옹, 스노 볼과 스킬러라면 나머지 두 마리 돼지의 이름은 무엇일까? 하지만 돼지들은 답지 않게 깨끗한 외모여서 돈공화국 귀족 같다. 혁명하다가 축출되어 피난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은 먹거리를 찾기 위해 길바닥을 주둥이로 수색하며 땅 거죽을 벗겨 파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두 코를 지뢰 탐지기처럼 작동해서 찾아낸 먹거리를 몸속으로 욱여넣고 있었다. 그들은 순례자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거리를 찾는데 열중할 뿐이다.

출발지로부터 12Km 지점에는 '비아꼬레 성모자상'이 고갯마루에 우뚝 서서 순례자들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메인 순례길에서 약간 벗어나야 모습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성모자상이 피레네 물안개 세례를 받으며 신선 같은 아우라를 연출하면서 우뚝 서 있다. 성모는 피레네 산맥 양치기들의 ‘수호성인’이란다. 평생 동안 보아온 성모상과는 다르게 때깔이 고운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가톨릭 예비 신자에 불과하지만 성모상에 십자가를 긋고 기도했다.

“성모님! 피레네를 무사하게 넘을 수 있게 살펴주세요!”

(좌) 먹이를 탐색하는 돈공들 (우) 비아꼬레 성모자상

피레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나폴레옹이 먼저 말해버려 김이 빠진 말 한마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

생장으로부터 론세스바예스 순례길 구간의 나폴레옹 길에서 나폴레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처럼.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길목에 있는 무인 대피소로 피신했다. 두세 평 정도 되는 작은 대피소 안에는 다섯 명의 순례자들이 탄산가스를 품어내면서 비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코로나 감염이 우려되었지만 코로나가 나를 공격한다 해도 우리는 “먹고 보자 피레네”를 중얼거리며 준비해 간 음식물을 꺼내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10분 만에 점심 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출발할 때는 느긋하게 걷자고 다짐했건만 비바람 때문에 내 원칙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다가 이정표가 비포장도로로 우리를 안내했을 때 길을 잘못 드는 게 아닌가 싶은 곳이 우리에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생장으로부터 18Km쯤에서 “롤랑의 샘”에 도착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수업시간에 들었던 “롤랑의 노래”의 그 현장이다. 나폴레옹 길에 ‘나폴레옹의 샘’이 아니라 ‘롤랑의 샘’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이름은 낭만적이지만 롤랑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롤랑의 샘물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왔다. 갑자기 아내가 유아원 다니는 손녀의 재롱과 새살이 너무 그립다며 손녀의 애창곡을 흉내 내면서 킥킥거린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X만 싸고 가지요.♬ ㅋㅋ

롤랑의 샘

♧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으로

그 옆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나타내는 표지 구조물이 초라하게 서 있다. 철책도, 여권을 심사하는 건물도 직원도, 국경을 지키는 병사도 없어서 허접하기 짝이 없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 간에는 국경을 없애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나라들이라는 실상을 보여 주었다. 기념사진을 찍으며 상념에 사로 잡힌다. 지난 70년간의 우리나라의 판문점과 DMZ의 삼엄한 경계가 오버랩되자 큰 차이를 발견했다.

여기서부터 나바라 지방(Navarra)이 시작된단다. 스페인에서 첫 출발점으로 삼는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와 나바라 주의 수도인 팜플로나 (Pamplona)가 자리 잡고 있다.

출발지 기준 21Km 지점에 순례길의 최고봉인 ‘뢰페데르 언덕’부터는 내리막길이 열렸다. 하산할 때는 사람의 체중의 5~6배가 발목에 실리기 때문에 관절과 무릎에 고통을 주게 되므로 유의해야 한다.

(좌)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우) 뢰페데르 언덕

지팡이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숲 속에서 비를 맞으며 잠자던 나무 가지를 깨워 지팡이로 대용해야 했다. 아내는 현지 조달한 지팡이가 거추장스럽다며 사용하지 않겠단다. 아직도 청춘인 걸로 착각하는 철없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못마땅하지만 그녀의 자유를 침해할 생각은 없다. 공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던 지인께서 부부동반으로 알프스 산을 등정했다가 부인의 다리가 부러져서 구조헬기를 타고 하산하여 귀국해야 했다는 경험담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비에 젖은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눈앞에 나타난 두 갈래길 이정표가 나의 판단을 요구했다. 짧지만 위험한 길과, 멀지만 안전한 길을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다. 비가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에 멀지만 안전한 포장길을 택했다. 신발에 물이 차올라 찌그덕거려 불쾌감이 온몸에 퍼진 지 오래다.

인생은 고행의 여로인가? 피레네는 멀리서 찾아온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 내게 돈을 주며 시켜도 하지 않을 일을 먼 나라 스페인까지 원정 와서 자발적으로 식식거리며 걷고 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가락의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순례길 첫날부터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 같다. 순례자에게 물집은 종양이나 마찬가지라는데 이를 어쩐대야? 장대비 때문에 신발을 벗어 상처를 살펴볼 겨를이 없다. 그러다가 비로 온몸이 젖어버릴 것 같아 도통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리막 길옆에 있는 목장에서 소들이 우중에도 풀을 뜯고 있다. 비 맞은 촌닭처럼 추레하지만 유유자적하는 소들의 자세가 여간 부럽지 않다. 비를 맞으며 뭐가 좋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는 정신 나간 인간 우거지(우중 거지)들을 바라보는 눈들은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저들의 의연함과 느긋함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저들도 머지않아 투우장이나 도살장에서 최후를 맞는 운명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의 내 운명을 알 수 있는가?

순례길에서 만난 목장

♧ 론세스바에스 알베르게에 체크 인

악전고투 끝에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프랑스 순례길에서 규모가 큰 피난처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각국으로부터 온 순례자들에게 세련된 영어로 친절을 무한대로 베풀어 민망할 정도였다. 우리 부부는 여섯 명이 자는 방에 침대 두 개를 배정하더니 차분한 안내가 뒤따랐다. 자원봉사자가 우리에게 식당의 위치와 식사 시간, 빨래방 이용법, 식당 사용법, 외부 식당이용법, 침대 사용법, 신발장의 위치, 신발 벗어 놓는 법, 사워장의 위치와 사용법, 침대의 락카의 사용료는 1€, 세탁기 사용은 4€ 등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전학 온 유치원생에게 시설을 안내할 정도로 마냥 친절했다.

(좌) 필그림 알베르게 (우) 알베르게의 2층 침대

발에 생긴 물집 때문에 고통스럽다며 약을 요청했더니 물집을 따주겠다며 바늘과 실을 챙겨 오더니 나에게 덤벼든다. 어릴 적 병원에서 주사기를 가지고 설치는 의사의 모습이 생각날 정도로 오싹해진다. 그 순간 친절이 넘치는 자원봉사자가 작두를 타는 선무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인근에 있는 레스토랑에 예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베르게 식당에서 손수 만들어 먹어야 했다. 식당에서 만난 한국에서 온 중년 아저씨가 건네준 김치와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니 자친 심신이지만 안정감을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샤워장에 들렸더니 생각보다는 지저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세수 비누는 이미 물에 불어 터졌지만 비누 거품이 잘 일어나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벙커용 2층 침대는 병원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서 가슴이 답답하기 짝이 없다.

60여 평 아파트를 홀라당 비워두고 떠나온 나와 아내. 석가모니처럼 출가한 것도, 전쟁통에 피난살이하는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유스호텔 같은 초라한 숙소에서 천근만근이 된 육신을 눕혀야 하는가? 자기가 선택했다는 억울함이 가슴을 때렸지만 심호흡으로 나를 어르고 달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０년 전의 군대 내무반 침상과 많이 닮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층에, 아내는 1층 침대에 누워서 곤한 몸으로 잠을 청했다. 이렇게 누추한 잠자리에 익숙하지 못할 것 같은 아내에게 괜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의 반응을 은밀하게 주시하며 눈치를 살폈다. 전혀 개의하지 않는 표정이다. 여자는 약하다? 천만에, 어머니는 강하다? 내 아들의 어머니는 너무 강하다? 아들의 어머니인 내 아내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했다. 장하다. 내 마누라!

문제는 아내가 너무 건강해서 걱정이 된다. 아내 핑계 대고 쉬엄쉬엄 걸으러 왔는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사라지고 있다.

아내는 전쟁터에 나온 잔다르크 같아서 도중하차하고 싶은 내 속마음은 절벽에게 헤딩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내가 아내에게 배낭여행의 기회를 너무 많이 준 내 관용으로 얻게된 부작용(?) 같다. 자업자득. 아내의 체력은 언제쯤, 어디쯤에서 바닥이 나고, 나에게 도움을 청할지 애매하다. 적어도 아내보다는 늠름하게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처럼 차오른다. 세렝게티에서 자유여행을 경험한 아내는 여전사답게 침대에 누워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아니 그녀가 나의 호위무사인데 착각하고 있다.

아내는 코를 골고 자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2층 침대에서 잠 못 이루는 나는 너무 괴롭다. 이웃 침대에서 잠 못 들어 엎치락뒤치락하는 호주에서 날아온 아저씨는 아내의 코골이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는 것이 분명하다. 미등 아래로 그의 짜증 난 얼굴이 포착된다. 홀로 눈동자를 멀뚱 거리는 나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휴대폰으로 스페인어를 공부하면 잠이 올 것 같은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잠자는 동안 잠꼬대와 코를 고는 것을 걱정하다가 도대체 언제 잠에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아침 기상나팔 대신 두부장사 종소리에 잠을 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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