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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죽게 됩니다.*의미 있게^^

영화 <미키 17> 리뷰

by 민드레 Mar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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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배우 조합 총파업 등 여러 차례 연기되어 아쉬움을 자아냈던 <미키 17>이 드디어 개봉했다. 봉준호 감독의 8번째 장편 영화 <미키 17>은 2025년 2월 28일 개봉한 작품으로,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이 원작이다.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베를리날레 특별 상영 부문 초청작이다. 



미지의 행성으로 이주하다.


2054년. 미키와 티모는 사채를 끌어다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빚더미에 앉게 된다.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던 이들은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행성 이주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그 행성의 이름은 니플헤임으로 지구에서 2번 낙선 후 입지가 모호해진 케네스 마샬이 새 행성 개척을 위해 식민 계획을 세운 곳이다. 다양한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고령이라는 이유로 불합격한 것을 본 미키는 아무 능력이 없던 자신이 탈락해 다리우스에게 잡힐까 봐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그렇게 티모는 비행선 조종사로, 미키는 익스펜더블로 선정되어 니플헤임으로 향하게 된다.



인간에서 소모품이 되다.


익스펜더블은 우주 식민지 개척을 위해 투입되는 복제인간으로, 임무 중 사망 시 휴먼프린팅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소모품 취급을 당한다. 어떤 방식으로 죽든지 휴먼 프린팅을 통해 다시 생산되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게 임무였다. 이때 미키는 서류를 제대로 읽을 걸 하는 후회를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만 그의 공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가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은 "죽으면 기분이 어때?"였다.



원작 소설과 다른 부분


우선 전체적인 설정부터가 다르다. 제목이 미키 7에서 미키 17로 바뀌었다. 10번 더 죽은 상태이며, 죽음과 휴먼프린팅을 17번 겪은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성장을 위한 선택이라는 말처럼 미키 17과 미키 18의 성숙도에도 차별화를 둔 설정은 인상 깊었다. 미키의 직업 또한 바뀌었다. 소설에서는 지구가 멸망해 사람들은 미드가르드로 이주한 상태이며 미드가르드 또한 자원이 고갈되어 새로운 행성을 개척해야 했고 이주를 시작하게 된다. 미키가 스포츠 도박을 하다 빚을 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사채업자를 피해 이주선을 탄다. 영화에서는 지구에서 친구 티모와 마카롱 가게 동업을 했다가 막대한 빚을 지게 되어 니플헤임으로 도망치듯 이주했다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소설에서는 미키가 역사학자였고, 새로운 행성에서 역사학자는 쓸모없기 때문에 익스펜더블을 지원했다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익스펜더블을 지원했다고 나온다. 마샬은 우주선의 사령관으로 소설에서는 사령관인데, 영화에서는 와이프의 말에 휘둘리는 멍청한 정치인, 독재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연구원 도로시의 역할을 더 부각하기 위해 소설에서 크리퍼와의 소통이 되는 부분을 영화에서는 뺀 것으로 보인다. 원작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독재자 부부가 펼쳐지는 정치 촌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원작 소설 리뷰


https://mindirrle.tistory.com/140



인간이 필요 없어지는 시대?


<미키 17> 속 세상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다. 2045년은 가까워진 미래를 상상하기에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상기시키기에도 적절하다. 허접하게 모방하는 것에 그쳤던 AI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용도로 발전했다. 직접적으로 만화, 영화, 소설과 같은 창작의 영역을 학습하여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만큼 이러한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뜨거운 논쟁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인간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윤리적 문제를 간과하는 부분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부적절한 이가 사용하며 발생하는 악용 사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신중하게 다뤄야 함을 보여준다. 종국에는 그 기계를 부숴버리지만 이것이 완전히 금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까? 



인간의 오만함, 제국주의 그리고 노동자.


인간의 오만함은 모르는 존재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곤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보였던 수많은 차별과 박해는 인간이 '다름'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준다. 성별, 장애, 사회 계층에 따른 인종 학살, 종교 전쟁, 식민지배를 자행하며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곤 했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우월감은 때때로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되며 현시대에도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인간적인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행성의 원주민인 크리퍼들을 식민 지배할 뿐만 아니라 혐오하고 배척하는 태도는 오만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배하려는 본성은 왜 변하지 않는 걸까.


영화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며 단체 포즈와 기립 박수를 유도하는 모습은 과거 제국주의의 어두운 역사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탐욕으로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했고 수많은 비극의 역사가 존재한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위협으로 남아있는 만큼 언제든지 제국주의가 반복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름'을 억누르고 '지배'하려는 욕망은 또 다른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다. 특정 집단의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문화를 멸시하고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의 폐쇄성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또한,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지도자가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권력 남용, 불평등, 부조리, 부패와 같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모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래 사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래 사회에서도 노동자는 쉽게 대체되고, 죽음조차 당연하게 여겨지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방식 중 하나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한 건 사실이다. 한국에서 흔히  "좀비가 와도 한국인들은 출근할 수 있다"는 농담처럼 미래 사회에서도 노동자는 쉽게 대체되고, 죽음은 더 쉽게 여겨질 수 있는 구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상당히 씁쓸했다. 



미키 17, 미키 18은 개별적인 존재일까.


이처럼 미키 17, 18의 설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단순한 복제가 아닌 개별의 존재로서 인식될 수 있도록 캐릭터의 성격이 뚜렷하다. 인간의 존엄성과도 직결될 수 있는 무한 자가복제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성격 차이는 개별적인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키 1부터 미키 16까지의 성격이 모두 달랐다고 언급이 되었지만 17과 18의 차이도 뚜렷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하게 보여줬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는 나이 18세를 설정하며 미키 17과 18을 더욱 부각한다. 17은 내향적이고 소심하지만 18은 적극적이면서도 불같은 성정이다. 같은 경험에도 다른 성격을 지닌 17과 18은 한 살 차이지만 사춘기와 어른의 사이에 놓여있기에 다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여러 면이 존재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나아간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등가교환 부분이 좀 마음에 걸렸다. 니플헤임의 원주민들은 인간의 학살로 인해 식구 루코가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인류도 하나 죽어줘야 행성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키 18이 그 문제를 해결했는데, 거기서 등가교환이랑 거리가 먼 일이 발생한다.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명백하게 1:2인 상황이다. 감독 또한 미키 18을 개별의 인간이 아닌 익스펜더블로 생각한 걸까? 


마샬이라는 인물은 입체적이지 않게 다루어 많이 아쉬웠다. 그저 일반적인 악인으로 비쳐 진부한 인물로 표현이 되었다. 친구와의 이야기를 축소하며 다소 납작해진 관계성을 보여준다. 특히 강제(?) 모험에 대한 내용이 빠지면서 미키 7과 미키 8에 대한 이야기도 허무하게 끝난 부분이 있다. 두 사람이 식량을 나눠먹는 부분이나 나샤와의 이야기 전개가 더욱 깊숙하게 다뤄질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쉬웠다. 



차가운 블랙코미디, 다소 기괴한.


<미키 17>은 건조하고 차가운 블랙코미디다. 거기다 기괴하다. 환호, 그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무도 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 기괴했다. 이 영화의 이질감도,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무관심도. 소설과는 좀 다른 이야기의 시작은 닫힌 결말로 끝을 맺는다. 소설과 영화와의 관계는 설정만 따온 별개의 이야기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애매함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생각보다 지루해서 기대에 미치는 못했다. 긴 상영시간? 잔잔함? 그것에 의한 지루함보다는 이야기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편명성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잔잔하다고 지루한 건 아니다. 영화 상영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몰입감을 가져다주는 영화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는 시도와 메시지의 나열이 아쉬움을 더한다. 분위기를 응축하여 반전시키며 한 번에 터뜨렸던 봉준호 감독 특유의 색이 이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


SF 영화 같지 않은 SF 영화 같았다. SF 액션을 기대했다면 실망감이 클 수 있다. SF 다큐멘터리에 더 까까운 잔잔한 드라마 장르다. 원작 소설에서 분명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고, 영화에서는 각색을 진행하며 일부 설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짜인 이야기가 빼곡하고 촘촘하게 진행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긴장감이나 몰입도 또한 떨어진다. 봉준호 감독은 무엇보다 불쾌한 영역의 풍자를 상당히 영리하게 풀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 왔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왜인지 노골적이면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교훈적인 의미가 표면적으로 스쳐 지나가다 보니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의 일부를 떼와서 만든듯한 느낌이 들었고, 전체적인 부분이 <설국열차>, <옥자>의 이미지가 연상된다고 해야 할까. 복제된 미키처럼 질문도, 작품도 거듭 복제한듯한 인상을 준다. 노골적인 풍자이지만 유쾌하지 않은 유머가 아쉽게 다가온다. 영어로 바뀌면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영화 자체의 의미나 농담이 덜 와닿았다.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표현과 말맛이 잘 살아있었다면 유머와 풍자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됐을 것 같다. 한국어에 한국어 배우였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이번 영화에서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기대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그의 다음 작품에서는 그만의 날카로운 시선과 독창적인 연출이 깊이 있게 담기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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