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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얼음 May 27. 2021

길에서 싸우는 연인

관계의 끝

그날은 비가 미스트처럼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필지 말지 고민되는 애매한 비였다. 말만 하고 계속 미뤄온 친구의 집들이를 성황리에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다정다감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을 품에 안게 된 내 친구의 행복한 가정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축하하는 마음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공허함이 몰려오는 날이었다. 그런 기분을 최대한 떨쳐내기 위해 생각을 비우려고 애써 주변 경관이나 날씨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터였다. 날이 흐려 그런지 일찍 어두워진 저녁 7시쯤 버스에서 내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큰 사거리의 신호등에 서있었다. 멍하니 빨간 불이 초록 불로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쳐다보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아래로 향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우산 없이 서로 마주 보고 서있었다. 그 남녀 사이에는 일 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었고 양쪽 다 어떤 움직임이 없는데도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먼 거리에서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연인이다. 


초록불이 환하게 밝혀지자마자 그 신호만을 기다렸던 주변 사람들과 자동차들은 각자 갈 길을 향하며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눈은 이상하게 그들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본인들을 보고 있는지조차 눈치 채지 못할뿐더러 알고 있다고 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에는 지금 나를 비롯한 주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미스트 같은 비도 꽤 오래 맞았는지 남자 여자 모두 머리카락이 약간의 왁스를 바른 것처럼 젖어있었다. 


내가 포착한 그 순간은 그들의 길거나 짧았던 연애의 마지막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쪽이 통보를 받았을 지도 혹은 합의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이별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쌓여왔던 오해를 푸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고 이미 헤어진 연인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자존심 따윈 버리고 설득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든 양쪽 표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달갑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하다.


빨간 불이 초록불로,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길을 건너가는 이 사거리에서 그들은 언성을 높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가 어떤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말로 풀어내면 좋을지 고민하다 침묵만이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둘의 의견을 좁힐 수만 있다면 시간, 장소, 날씨, 주변 환경 따위는 고려할 요소가 아닐 것이다. 둘만의 관계에 집중할 그런 용기 없이는 애초에 이 관계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대와 더 가까워진다는 것은 가까워진 만큼의 거리가 내 뒤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용기 있는 사람만이 사랑도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맨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빨랐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것이 맨홀이라는 걸 알기에,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내게 적합한 일인지 충분히 생각하게 되는구나.

-CmKm


나는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가 기분 나빠할 만큼 뚫어지게 쳐다볼 위인은 못되고 그저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힐끗힐끗 관찰하는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길에서 싸우는 연인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 나도 한 때는 내 연인과 함께였다. 길에서 냉전 상태에 있는 커플을 발견하고 우리끼리 재미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저들이 싸우는 거라고 살을 얹어가며 영화 한 편의 시나리오를 펼치던 우리 역시 마지막엔 그들과 같은 순간을 맞이했었다. 생각해보니 그날도 비가 왔었다. 헛소리로 희희덕대며 함께 스토리를 만들었던 영화의 주인공이 타인이 아닌 내가 되는 순간. 그때 누군가는 우리를 보며 단박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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