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네.'
실망감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마우스 스크롤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연말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2018년은 상사들의 관심이 집중된 TFT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했던 해였다. 개인적인 역량을 마음껏 펼쳤고 인정도 많이 받았다. 당시 본부장 님은 나를 보면 빛이 나는 것 같다고 ‘빛광현’이라는,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한 별명을 지어주셨다.
하지만 떨어졌다. 과장도 아니고 대리 승진, 직장생활 첫 승진이었다.
그날 저녁 팀장님은 소주를 따라주며 일찍 승진하면 집에 가는 날만 빨라진다고 말했다.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건가. 입을 한 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 “네가 떨어진 건 정말 말이 안 된다”는 동료들의 이야기가 고맙긴 했지만 마음을 달래는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조만간 사원, 대리 모두 ‘매니저’로 통칭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내 직장생활에 이제 대리는 없구나. 사실 상관없는 일인데 괜히 더 씁쓸하다. 그다음 해 나는 1년 늦게 승진했고, 그렇게 박광현 '매니저'가 되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직장생활을 잘한다는 것 사이의 간극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거리를 상사와의 관계나 자기 업무에 대한 소위 '광팔기'로 좁히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받지 않겠다는 이상한 객기가 솟았다. 맡은 일을 소홀히 하진 않았지만, 회사생활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지 않도록 스스로 선을 그었다.
월급쟁이라는 정체성의 끝엔 뭐가 있을까.
8년 넘게 직장을 다니면서, 팀장을 내려놓은 고경력자분들이 조직 안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 많이 봐왔다. 중요한 업무를 맡을 기회는 성장해야 할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은퇴를 준비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연말이 되면 해고 통보를 받은 임원들은 매번 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정리하고 나가곤 했다. 임원이 직장생활의 꽃이라던데,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그 자리의 결말은 항상 시든 꽃보다 더 서글펐다.
오랜 시간 헌신한 이 사람들은 왜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떠날 수 없는 걸까. 한 사람이 회사 안에서 쌓아 온 경력의 가치를 조직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한국 직장인이 주된 직장에서 나오는 평균 나이가 49세라고 한다. 나 못해도 100살까진 살지 않을까. 직장 안에서의 생태계에 오롯이 시선을 맞추고, 승진이라는 목표를 향해서만 내달리기엔 그 이후의 시간이 너무나 길다. 그럼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뭘 할 수 있을까. 막연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