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티드 인살롱 기고글입니다)
“여러분이 회사에서 보내는 매일의 일상은 어떠신가요?”
며칠 전 이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매년 하반기에 있는 조직문화진단 홍보 메일입니다. 몇 주 뒤에 진행될 예정이니 관심을 갖고 미리 준비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올해는 어떤 얘기를 할까 하는 고민과 함께, 벌써 연말에 가까워져 가는구나 싶어 조금 헛헛한 마음도 듭니다.
회사에서 익명으로 의견을 낼 일이 예전보다 많아졌습니다. 조직문화진단부터 리더십 평가, 교육 만족도 설문, 최근에는 고경력 동료에 대한 다면진단까지 추가되었습니다.
이렇게나 기회가 많은데 말이죠. 저는 아직도 익명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데 서툰 편입니다. 특히 주관식 문항에서 항상 고민이 많아집니다. 진짜 솔직해도 괜찮을까? 너무 길게 쓰면 나인 게 티가 나려나? 내 진심이 얼마나 전달될까? 뭐 대단히 날카로운 얘기를 쓰려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다 결국 어떤 구체적인 의견보다는 평가 대상에 대한 두루뭉술한 이야기 몇 자 끄적이고 마는 것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저는 구성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이번 조직문화진단을 좀 더 진정성 있게, 나와 조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써먹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익명에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라인드라는 공간을 통해 그 힘을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요즘은 단순히 직장인들의 대나무숲을 넘어서, 기업과 관련된 여러 사회적 이슈들이 블라인드 게시글 하나에서 시작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정보의 신뢰성, 명예훼손과 관련된 우려가 존재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현장감 있는 정보나 직원들의 솔직한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 확실한 효용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사내 인트라넷 안에서 자체적인 익명 게시판이나 채팅방 운영을 시도하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익명성을 활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모 회사에서 5년 넘게 운영해 온 사내 익명게시판을 실명제로 전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기사화되었습니다. 하루 3천 명 이상이 접속할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되어 온 케이스지만, 최근 경영악화로 회사에 대한 부정적 의견의 등재가 잦아지면서 실명제 전환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기사의 설명입니다.
서로가 윈윈이라는 회사의 판단이 없다면 지속될 수 없는 것이 사내 익명 커뮤니티의 한계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은 회사의 제도니까요. 사례를 보면서 블라인드와 같은 외부 채널에서의 익명성과, 사내에서 공식적으로 부여되는 익명의 발언 기회는 조금 다르게 접근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익명이라는 조건 하에서 자유와 안전함을 떠올립니다. 최소한의 매너만 지킨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더라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물론 그것이 익명의 기본적인 속성이지만, 회사 안에서의 익명성을 활용할 때 집중해야 할 것은 ‘나에 대한 보호’ 보다는 ‘내 의견에 대한 보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익명으로 낸 의견이 소속, 성격, 평소의 인간관계 등과 같은 나의 실명이 갖는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 그래서 그 의견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회사 안에서의 익명성이 갖는 본질적인 역할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은 나의 동료와, 내가 속한 조직이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접근일 테고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건 또 다른 일이지요. 조직문화 진단까지 2주 정도 남았는데 고민을 많이 해봐야겠습니다. 제가 낸 의견이 익명이라는 투명망토를 쓰고, 나의 실명이 만들지 못할 어떤 작은 변화를 조용히 이뤄낼 수 있도록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