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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Jan 25. 2021

닿을 수 없는 타인을 담는 말

현실의 차가움을 중화하는 낭만의 말

‘말’에 대해 떠올린 두 가지 단상 중 첫 번째 단상.


요즈음 난민과 이주민을 알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연구'와 '공부' 중 어떤 단어가 적합할까 고민했는데, '알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한 것 같네요. 연구대상으로서 난민과 이주민을 접하기도 하지만, 연구자-연구대상으로서의 관계 이전에, 삶의 한 부분을 나누는 동료이자, 서로 존중해야 할 타인으로 먼저 여겨지곤 하니까요.


지난 몇 개월 간 텍스트를 통해 여러 이동 중인 사람들을 접해왔습니다. 가령 난민과 이주민, 이주여성돌봄노동자, 탈북민의 삶을요. 그러곤 이동하지 않는 사람들, 국민, 시민의 삶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이동하지 않는 사람의 위치에서 난민과 이주민을 마주하고 상상하고 쓰고 말할 때면, 가슴 한 켠에 답답한 물음이 남습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낭만'이란 말을 입에 담고 나면 왠지 모르게 부푼 듯한 느낌이 들어요. 어떤 기대감과 아름다움이 솟아나는 느낌. '낭만'의 공기는 '현실'의 공기보다 살짝 위쪽에 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낭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현실'일까요. 혹은 '현실'에 어떤 속성을 덧붙인 말, 가령 현실의 '차가움', 현실의 '혹독함', 현실의 '가혹함' 같은 것들일까요, 이런 말들은 '낭만'의 반대말이 될 수 있을까요? 섣불리 그렇다 말하려니 사뭇 망설여집니다. '낭만'과 '현실'을 이분법의 극단에 위치 지으려니, 정말이지 낭만은 닿을 수 없는 환상의 영역인 것만 같고, 현실은 마냥 차갑고, 혹독하고, 가혹한 것만 같이 느껴지네요.


그런 낭만의 반대 영역, 가장 가혹하고 가장 혹독하고 가장 차가운 곳에 대해 상상해봅니다. 그곳에서 '낭만'이란 말을 꺼내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런 현실의 속성들을 중화하기 위해 낭만의 말을 주입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의 낭만을 주입하는 것이 적정할까요? 그런 현실의 당사자가 아닌 내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는 내가, 어떤 삶의 모습을 두고 희망과 낭만과 사랑의 말들을 주입하는 일은, 과연 내게 허락된 일일까요.


매주 난민과 이주민에 관한 쪽글을 쓰면서, 그러한 현실 속 폭력, 차별, 배제의 단면을 한참 동안 드러내고 글을 마무리할 즈음, 그간 드러낸 절단부를 봉합하기 위해 어떤 말들을 찾습니다. 이 단면들이 다시 맞닿기 위해선 동화 속에서나 가능할 대안의 세계를 상상해야 해요. 현실엔 없는 환상의 나라를. 그 나라에선 난민과 이주민과 국민과 시민이 모두 서로에게 타자가 됩니다. 모두가 주인이고, 모두가 손님인 나라. 모두가 환대하고, 환대받는 나라.


프랑스어에서 ‘주인’을 뜻하는 ‘hôte’라는 단어는 '주인'과 '손님'의 뜻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단어 안에서 모두는 서로에게 주인이자 손님이 되죠. '수용(受容)'이란 단어에서, '수(受)'의 어원에는 주고받음에 별다른 구분이 없어,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었다고 하고요. 그러면 저는 난민을 가두는 장소로서의 수용소(收容所)가 아닌, 모두가 서로의 문화와 가치를 건네주고 건네받는, 주인(hôte)이자 손님(hôte)으로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공간으로서 수용소(受容所)를 상상합니다. 그렇게 글이 마무리돼요. 차가운 현실을 덮는 적당히 따뜻한 말들로. 그런데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요?


타인을 담는 나의 말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과장하지 않고 묵묵히 상태와 상처를 드러내는 말. 현재를 악화시키지 않는 말. 불가능한 낭만, 환상, 희망, 사랑과 같은 것을 담으면서도 현실의 차가움을 대조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덮어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드는 말. 다 뱉어내고도 후련하지 않은 말,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마주하며 고작 슬픔을 느끼고 쓰는 일이 전부임을 깨닫는 말, 그런 미안함과 먹먹함이 남는 말. 그래서 계속 멈추지 않고 쓸 수 있는 말.


'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나니, 쓰는 일이 더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쓰지 않으면 안되는 삶이 있으니까, 드러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삶과 사람이 있으니까. 글쓰기와 말에 대한 고민은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타인을 향하는 말에 대해 신중해지는 것은, 어쩌면 그런 타인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을 말하는 것이 꼭 감춰진 내 자신을 말하는 것만 같아서요. 타인에게 닿으려는 나의 말의 시도는, 내 스스로에게 닿으려는 말의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나는 그간 나의 결핍과 부족을 환대하고 받아들이기보단 감춰왔던 걸까요? 주인(hôte)이자 손님(hôte)으로서 스스로에게 주는 환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또 다른 말에 대한 물음들이 생겨나네요.


결국엔 제 스스로에게 닿을 물음들이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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