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mundus Jan 25. 2021

겨울에 내리는 여름의 비

홍차와 마들렌

비 오는 날, 체육관.
창밖엔 비가 내리고, 창가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들려온다.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를 들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빗소리를 듣기 위해 빗소리를 들었던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어떤 여름의 날들이 떠오른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카페 테라스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보며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길 꿈꿨던 날. 그리고 어떤 비 오던 오후, 미리 봐 둔 카페 테라스에 앉아 꿈을 현실로 끌어왔던 날. 현실은 꿈과 달라, 꿈엔 없던 강풍과 축축함과 꿉꿉함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지만, 그래도 그런 게 낭만이라며 꿋꿋이 앉아 버텼던 기억.

비슷한 고집을 피웠던 겨울바다의 기억도 떠오른다. 추운 겨울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아름다울 줄만 알고 무작정 겨울바다를 향했다가, 카페 테라스의 강풍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강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가눌 틈이 없었던 날. 그런데도 겨울바다를 앞에 두고 서있다는 생각에 왠지 뿌듯하고 행복했던 기억.

겨울 새벽 오른 태백산도 떠오른다. 오늘 밤 태백산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무작정 짐을 챙겨 기차에 올랐던 날. 겨울 산 추위를 말로만 알았던 난 평소 신던 필라 운동화에 청바지, 목도리, 패딩만으로 무장한 채, 그걸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눈 쌓인 산길을 푹푹 밟고 정상에 올랐을 때 체감온도가 영하 30도쯤 되었더랬나. 친구가 가져온 소주 한 병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그제야 등산로 입구 편의점에 수없이 진열되어 있던 조그만 양주들의 까닭을 알게 되었던 기억.


그런 게 낭만인 줄로만 알고 무작정 실행에 옮겼던 날들이었다. 예상과는 너무도 달라, 오히려 짙게 남은 기억들. 이젠 그런 꿈과 낭만의 실상을 알기 때문에, 굳이 비 오는 날 테라스에 앉지 않고, 겨울바다가 보이는 안락한 실내 찾으려 하고, 웬만해선 겨울 산에 오르지 않으려 한다. 갑작스레 결정해서 여행을 떠나는 일도 거의 없게 되었고.

그런데 그간 많은 궁금증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새삼 씁쓸한 기분. 나에겐 어떤 호기심이 남아 있나? 질문하지 않은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호기심을 발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체육관의 빗소리는 프루스트의 홍차와 마들렌과 같으려나. 그럼 오늘은 어떤 기억으로 남으려나?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 혹은 그런 창가의 형상? 일단은 먼 미래에 알지도 모를 호기심이라 해두겠다.

겨울에 내리는 여름의 비.

오늘의 간식은 홍차와 마들렌.

작가의 이전글 투명망토의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