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천천히 닮아가는 중입니다》

나의 소설 도전기 첫 단편 소설

by 감성소년

새벽의 두 그림자 아버지가 현관문을 나서는 시각은 새벽 4시 40분. 나는 택배차량에 오르기 전, 같은 시간에 옷 매무새를 다듬으며 출근 준비를 한다. 말은 없다. 신발을 신으며 눈빛이 잠깐 마주친다.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60f8bb62-043b-4656-9f77-5512909d9feb.png

그날도 비가 왔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엄마는 새벽일 나간 상태였다. 집 전화가 울렸다. 요즘엔 보기 힘든 그 회전식 전화기. “네 아버지, 병원에 계시다.” 그 한 마디에 나는 고무줄도 못 묶고 슬리퍼를 신고 병원으로 뛰었다. 회색 병실. 아버지는 말없이 누워 있었다. 침대 발치엔 엑스레이 사진이 뒤엉켜 있었고,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 “발목 인대가 50% 이상 파열됐습니다. 평생… 정상 보행은 어려울 겁니다.” 순간 숨이 멎는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걷기 힘들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산책을 하던 우리 아버지가.....

8a34e965-9fea-4a0e-be0d-a8dbdf187fa2.png

그날 이후, 아버지는 왼쪽 다리를 살짝 끌며 걷는다. 계단을 오를 땐 발에 무게를 실지 못했고, 앉았다 일어날 땐 항상 "읍" 하는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집엔 정적이 더 늘었다. 말은 없었고, 아버지는 늘 신문만 펴 들었다. 가끔 뒤꿈치를 주무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남자는 아파도 말 안 하는 거구나’ 하고 배웠다. 아버지가 다치신 이후로 우리 집은 급격하게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다. 어머니도 일을 나가게 되었고, 나 역시 이침 신문 배달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신문을 볼 뿐이었다. 아버지가 다쳐서 그렇다는 것은 알았지만 다른 얘들처럼 그냥 학교 다니고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리고 결국 그 원망은 커지고 커져,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91ebacec-38ab-450a-a008-9fb3cd441416.png

서울역에 처음 내렸을 때, 나는 딱 한 문장만 머릿속에 붙들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반드시 공무원이 되어 아버지처럼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 거야.” “반드시 공무원이 되어 나와 같은 공무원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 것이고 나는 그 가정을 온전하게 책임지는 가장이 될 거야” 그렇게 다짐을 했다.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노량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온통 빨간 간판들, 학원 광고 전단지,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그 모든 풍경이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나는 그 안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vz5KQZjDH3pOjzd0X6bV3DEwciOZdnvzHkMW4Mis%3D

처음 1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직은 괜찮다. 시작이니까. 매일 오전 9시 수업에 들어가고, 밤 11시 독서실 불이 꺼질 때까지 책을 봤다. 동기들끼리 삼각김밥 나눠 먹으며, “형, 이번엔 느낌 좋아요” 하고 웃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다”는 말이 입안에서 점점 사라졌다. 2년, 3년, 5년. 시간은 흐르는데, 나는 어디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휴학을 이어가다 결국 자퇴했고, 고시원 벽지는 점점 누레졌다. 지쳐서 이제 이 공부를 그만둬야 하나라 생각이 들 때쯤. 어느 날, 세면대 앞에서 내 얼굴을 봤다. “어? 나, 아버지랑 똑같은 표정 짓고 있네.”

48a28e40-2600-4389-aac7-201de9ca8a80.png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공무원 시험 최종 탈락. 네 번째 최종 면접이었다. 그날, 나는 조용히 노량진을 떠났다. 돌아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아버지가 있는 고향.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그 동네, 그 집, 그리고 그 사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제야 나는 “나는 어디로도 도망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부정하며,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5c9772fb-23cf-48ec-8938-78627db6dd60.png

아침 5시 12분.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익숙한 통증이다. 오늘도 다리뼈를 깨우며 하루를 시작한다. 택배 차량은 이미 도착해 있다. 바퀴 옆에 묻은 진흙이 굳어가는 틈에서, 나는 단단히 묶인 끈을 풀며 혼잣말을 한다. “오늘은 가벼운 동선이길…” 하지만 그런 날은 드물다. 누구도 내 하루의 무게를 줄여주지 않는다. 반대편 골목 모퉁이. 경비복을 입은 아버지가 나타난다. 기지개를 켜고, 파란색 보온병을 흔들며 경비실로 들어간다.



“기사님, 다음엔 제발 뛰어주세요.” 하지만 나는, 이미 무릎에 물이 차올라 계단 위에서 숨을 참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버지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나는 그 길을 지나가며 물 한 병을 아버지 무릎에 살짝 올려놓는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병을 쥐고, 나는 말없이 걷는다. 그건, 우리만의 인사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작고 단단한 유대. 밤 9시. 배달이 끝나면 나는 온몸이 무너진다.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침대에 널브러져 버린다. 잠결에 아버지가 귀가하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절뚝거리는 걸음. 현관 비밀번호 소리. 그리고 낡은 발자국 소리. 그것이 아버지다. 말이 없어도, 존재만으로 울컥하게 만드는 사람.


raw?se=2025-06-25T03%3A40%3A44Z&sp=r&sv=2024-08-04&sr=b&scid=f414959a-8198-58a0-97bf-7cb20f9593f1&skoid=add8ee7d-5fc7-451e-b06e-a82b2276cf62&sktid=a48cca56-e6da-484e-a814-9c849652bcb3&skt=2025-06-24T14%3A15%3A58Z&ske=2025-06-25T14%3A15%3A58Z&sks=b&skv=2024-08-04&sig=G1k%2BT3hBnJGgVjNfuTLWN2CA1gwETOJURxmbpBc8Te4%3D


그날 밤, 나는 소주 한 병과 삼각김밥 두 개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는 텅 빈 김치통이 덩그러니 있었다. 말없이 자리에 앉아, 아버지 앞에 소주를 놓았다.

“같이 한 잔 하실래요?”

아버지는 잠깐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자리에 앉았다.

잔이 찼다.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고, 우리 사이엔 침묵이 올랐다.

“어때.”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택배 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보단 덜 절뚝거려요.”

그러자 아버지 얼굴이 순간 딱 굳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게 자랑이냐.” 하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저는…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공무원 되면… 좀 다를 줄 알았어요. 근데요, 결국 아버지랑 똑같이 살고 있어요. 그래서 더 싫어요. 이젠 나 자신까지 싫어졌다고요.”

그 말을 내뱉자, 가슴 한켠이 찢어졌다. 한 번도 제대로 뱉어보지 못한 말. 속으로만 곱씹던 말.

아버지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너한테만은 그런 고생 안 시키려고 했어. 그러려고, 다 참고 살았어. 그래서… 말 안 한 거야. 내가 말하면, 너도 더 힘들까 봐.”

아버지의 눈이 붉어졌다. 그날 처음으로 봤다. 눈시울이 젖은 아버지.

“미안하다. 내가 널… 내가 나를, 너한테 물려줬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주잔을 들어 아버지 잔에 조심스럽게 따랐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넌 내 아들이라서… 다행이다.”

그 말 한 줄이, 내 안에 있던 모든 분노를 녹여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말이 아닌 온기로 울었다.

7T3P6C3d1etc5FnqEsg1Og%3D



다음 날 아침. 현관에 놓인 도시락 하나가 눈에 띄었다. 손잡이엔 구겨진 메모지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아버지의 글씨체였다.

“어제 너 술 마시고 밥 못 먹었잖아. 남은 반찬이지만, 아침은 챙겨 먹고 가라. – 아버지”

나는 그 도시락을 들고 잠시 서 있었다. 눈이 시큰해졌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택배차 문을 닫으려던 찰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야.”

나는 멈춰 섰다. 등 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너 예전에 공부하던 방… 아직 그대로다. 치우지도 않고 그냥 놔뒀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배달을 끝내고 돌아와, 나는 조심스럽게 그 방 문을 열었다. 창틀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책상 위엔 내가 쓰던 문제집이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 있었고, 시간만이 흘러갔다. 나는 천천히 방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0%3D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문득, 아버지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한쪽 발을 살짝 끌며 걷는 그 소리.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나는 아버지처럼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이 되자, 나는 내 도시락통을 씻어놓고 아버지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은… 아버지가 좀 챙겨드세요.”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잠들기 전,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조용하고, 하지만 변함없이 다정한.

그 소리가,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애드테크 AI] 몰로코, 광고 시장 뒤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