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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Jul 15. 2022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이야기

15." 멋있는 거지 하나만. " 거지에 대한 환상

2014.10.22


나는 거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거지가 좋다며 고등학생 때는 캐릭터를 잘 그리는 친구를 졸라 제발 멋있는 거지 하나만 그려달라고 했었다. 그 착한 아이는 성심성의껏 몇 가지 멋진 거지의 그림들을 그려 내게 선물을 주곤 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몹시 기뻐하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두곤 보았다.

거지에 대한 선망은 그 후로도 꽤 지속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도 가끔 만나게 되는 그 친구에게 또 만난 기념으로 거지를 그려달라고 졸랐었다. 유럽과 베이징 여행을 갔을 때에도 내 눈에 점점 인상적으로 들어온 것은 각국의 특색 있는 거지들의 모습이었다. 어디에나 거지는 있었고, 그들은 매우 다양한 나름의 방법으로 동냥을 해 생활하고 행색 또한 아주 다양했다. 프랑크푸르트의 거지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깔끔하고 예의 바른 노신사였으며, 프라하의 거지는 일부러 온몸을 비틀고 꼬아 힘겨운 모습으로 한 자리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등등 다양한 거지들 중 거지라면 생각나는 누추하고 변변치 못한 행색을 가장 잘 갖춘 거지는 런던과 베이징의 거지였다. 복장보다도, 그들의 냄새는 대단하였다. 베이징에서 본 또 다른 거지가 가장 인상적인 거지였는데, 지하도에서 목청껏 노래를 한 곡조 소름 끼치게 뽑아내는 그 거지는 앞에 지폐를 한가득 쌓아 놓고 있었다. 그는 거의 가수라고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지내면서도 물론 다양한 거지를 만났다. 상쾌한 아침에 만났던 어떤 거지는 바바리코트 안쪽에 까만 비닐봉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각각 무언가 쓸 것들이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꽤나 독특한 행색이라 멀리서 다가올 때부터 한참 시선을 거두지 못했었다. 햇빛을 받아서인지 환한 얼굴에다 양 어깨 아래로 눈부시게 비닐봉지를 반짝거리던 그 사람.

시간이 흐르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알 수 없는 반짝임의 비밀을 나름대로 알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신비로움만은 아닌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선망했던 거지의 모습은, 독특하고 거리낌 없는 자기만의 분위기와 행동방식으로 항상 그렇고 그러한 길이며 일상에 등장해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스스로는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다는 점은 정말 엄청난 매력이다. 그들이 함께하는 곳은 환기가 되면서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들과 함께 하는 세상이기에 더욱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살만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에게 그들은 마치 걸어 다니는 순수한 시 같았다. 그들에겐 동정이 필요치 않았다.

물론 내가 선망할 수 없는 거지의 모습이 더 많았다. 현재의 자기 삶과 생활 방식.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일치감이 없이 비관을 지닌 모습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사실 어디든 흔하다. 그런 흔한 모습의 거지는 절대로 매력적일 수 없었다. 거지로 살아가든 아니든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지언정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과 마주하는 세계가 그만의 소중한 삶 자체라면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소중하면 다른 이의 삶이 소중한 것도 아는 법이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얼굴에서 빛이 나는 여자분을 길에서 마주쳤다. 오랫동안 많은 여행을 했을 법 한 뭔가 신선한 매력이 느껴졌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 앞을 계속 왔다 갔다 너무도 열심히 걷기에 그때에서야 그녀의 조금 철에 맞지 않는 행색이며 등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덕분에 오래간만에 거리에서의 작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의 사랑스러운 거지들을 발견하지 못한 지가 오래였었다.  그저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혹시 그러한 삶들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고 멸종되어 가는 것일까.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신중한 자에게 포착되는 삶의 아름다움을 지닌 세상의 순수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15.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얘기 - " 멋있는 거지 하나만. "|작성자 onlyweek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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