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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Aug 17. 2022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이야기

19." 새해의 겨울산으로. "

2014.12.17


겨울인데도 하늘 끝자락에 누렇게 짙은 황사를 볼 수 있다. 겨울에 황사라니.

파란 하늘에 닿은 산 공기가 그리워진다.

최근 몇 년은 새해를 맞이하는 여행을 줄곧 산으로 갔다. 겨울산은 정말 매력적이다. 동트기 전의 깊은 까만 밤에 오르기 시작해 떠오르는 해에 조금씩,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하얀 풍경을 보면서 산 중턱에서 아침을 맞는 길이 참 좋다. 모든 것을 얼리는 시린 찬 공기도 산에서 느껴 볼 수 있는 찐한 겨울의 맛이다. 내가 가 본 겨울산 중에서는 태백산이 정말 아름다웠다. 주목 군락지에 쌓인 눈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안 그래도 시린 눈이 반짝이는 하얀 눈 풍경에 더욱 시리다. 산이 아주 험하지는 않았는데 술병이 다 얼어버릴 정도로 정상의 추위가 너무 심했었다. 한라산도 참 좋았었는데, 눈이 등산로 위로 몇십 센티미터가 쌓여있어서, 상당히 조용하면서 길이 평탄하고 걷기에 좋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은 겨울산만 가보았는데 봄이나 다른 때엔 어떤지 꼭 가보고 싶다.


2014년의 1월에는 꼭 가보고 싶어 했던 지리산에 갔었다.

서울 강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지리산 초입인 백무동에 바로 내려주기 때문에 편하게 갈 수 있다. 네 시간이 걸려 도착하자 아침햇살이 밝았다. 산자락에 여럿 있는 민박집과 밥집들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너무 추운 겨울에는 지대가 높은 곳에 물이 닿지 않는다고 하던데 물 때문인지 다들 장사를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오르며 느낀 지리산은 겨울 산의 모습이 예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수기라 장사를 접나 보다 싶었다. 낙엽수들이 빼빼 마른 모습들로 듬성듬성 서 있고 고목들도 꽤 많았다. 눈이 쌓여 너무나 아름다웠던 태백산에 비하면 그리 감탄할 경치는 아니었지만, 울창했던 계절을 지나 평온한 휴식을 갖는 지리산의 깊은 겨울 모습도 멋졌다. 눈길을 뽀득뽀득 밟으며 매우 가파른 빙벽 같은 오르막들도 건너고, 아주 작고 작은 샘, 참샘도 만나서 목도 축이고 물도 받고 하였다. 물이 참 귀한 겨울 산에 반가운 샘물이다. 무사히 하루 산행을 마무리할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조금 이른 네 시쯤이었다. 하지만 산의 저녁은 빨리 찾아왔다. 지리산을 하루에 넘기는 좀 빠듯해 위험하기 때문에 대피소에 반드시 미리 예약을 하고 입산해야 한다. 아홉 시가 가까워 다음 날의 해맞이 산행을 위해 일찍 들어가 쉬면서 몹시 어수선한 꿈을 꾸었다. 꿈이라기보다 가위였는데, 방에 가득한 웅성거림과 귓가에 대고 말하는 섬뜩한 아저씨 목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열두 시. 아침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는 정말 지독히 긴 시간이었다.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와 뼛속까지 시렸고, 가진 것을 다 덮고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추워서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또 그 아저씨들이 귓가에서 웅성거릴까 봐 무섭기도 했다. 지리산의 우울한 옛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혹시 정말 원혼들을 만난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을 하며 스스로 열심히 숙면을 방해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자던 사람들도 한기에 견디다 못해 핫팩을 붙이고, 나중에 먼저 자리를 뜨며 감사하게도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셨다. 그렇게 긴긴밤을 기다려 퉁퉁 부은 얼굴에 대충 눈곱을 털고 구겨진 팔다리를 펴서 여섯 시 오 분쯤 천왕봉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런데 위층의 남자 방들은 덥기까지 했다는 거다. 여자 취침실만 지하라 추웠던 건가. 산은 아직 까만 밤. 달빛이 아주 밝았다. 밖은 잘 때 보다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오르막이 처음에 엄청 가파르고 얼음으로 덮여 험하였다. 좀 지나고 나서는 아주 완만한, 눈이 두텁게 쌓인 멋진 길이 나왔다. 달과 눈높이가 가까워지고, 달 반대편 하늘엔 곧 태양이 떠오를 자리가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고선 금세 점점 밝아져 왔다. 완전히 해뜨기 20분 전쯤 천왕봉에 도착했는데, 칼바람이 치고 꼭대기답게 몹시 추웠다. 천왕봉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천구백십오 미터 정도란다. 알아본 해 뜨는 시각에 딱 맞추어 손톱만 한 해가 뾰족 고개를 내밀었다. 새빨간 작은 해가 너무 귀여웠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뜨자마자 구름에 가려져 곧 사라져 버렸지만 일찍 산에 올라 해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에게 멋진 추억과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이날이 해가 보이는 날로 미리 확인이 되었는지 SBS촬영팀이 와 카메라로 촬영 중이었다. 천왕봉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보기란 삼대가 공덕을 쌓아야 가능하다 할 정도로 힘든 일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 영광스럽게도 해를 보게 되어 기뻤다. 아 우리 집안이 정녕 삼대가 공을 쌓았단 말인가요. 내려오는 길에 구름 밑에 온전히 떠 있는 더 멋진 모습의 해를 볼 수 있었다. 아침 햇빛은 진하면서 은은하게 눈밭 위를 비추었고 그 보랏빛의 분위기가 꿈처럼 환상적이었다. 지난밤의 악몽과 고생이 아깝지 않다고 경탄하며 열심히 내리막을 내려가 법계사까지 닿았다. 법계사도 살짝 들러 가 보곤 바로 로터리 대피소에서 간식을 먹고 재정비를 한 후 마지막 기점인 중산리까지 가기 위해 서둘렀다. 내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산행을 이어가고 있어서 어서 내려가 밥을 먹자는 생각이었는데 로터리대피소에서 방향을 잘못 트는 바람에 거리가 긴 쪽 길로 가게 되었다. 긴 만큼 완만한 길이고 잘 정비된 길이라 걷기는 좋았지만 예상보다 한 시간 반 이상을 지체해서 중산리에 도착했다. 결국 땀에 찌든 몰골로 버스를 타고 진주에 도착해 시외버스 바로 옆의 '와룡성'이란 반점에서 탕수육을 먹었다. 맛은 아주 평범했지만 정말 맛있게 흡입했던 것 같다.

운 좋게도 천왕봉에서 귀한 일출도 본 2014년은 어떤 한 해였나. 그리 좋은 일이 많았던 한 해는 아니었다. 일출을 보는 건 새로운 출발에 새 기운을 북돋고 싶은 다짐이지 본다고 해서 행운이 생기는 게 아니긴 하다.

사실 굳이 산에서 보는 일출이 바다나 들보다 어마어마한 풍경인 것도 아니다. 멋진 겨울 산을 오르는 게 좋고, 천천히 힘들여 정상에 갔을 때 마침 멋진 일출까지 본다면 더욱 기분 좋게 내려올 수 있는 것뿐이다. 이번 새해에도 꼭 겨울산을 오르는 것으로 한 해를 나름 기운차게 시작했으면 좋겠다.



아직 가보지 않은 산들 중 하나, 아니면 갈 수 있었던 가까운 산인데도 이상하게 정상까지는 가보지 못 한 원주의 치악산도 좋을 것 같다. 치악산 밑 황골의 황골 엿 막걸리를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찡한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그 술 한잔 하면서 뜨뜻한 방에서 자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역시 어디로 떠났었던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니 그때가 떠오르고, 또 어디론가 가고 싶어 져 즐겁다.        

[출처] 19.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얘기 - " 새해의 겨울산으로. " |작성자 onlyweek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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