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 성공이란 욕망의 클라쓰

Z세대, 성과주체로서의 딜레마

by 정준민

1. 남산타워, 이태원이란 성공의 상징

남산타워가 13화까지만 봐도 50번은 나온다. 왜 그렇게 남산타워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이태원이란 곳에서 남산타워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산타워가 보이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이곳이 이태원임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남산타워가 제시되는 모습들의 공통점을 추출해보면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공통점은 뭔가 캐릭터들이 간절히 원하는 꿈이 제시되거나, 그 꿈이 좌절됐을 때 남산타워가 미장센으로 제시된다. 이때 남산타워는 무조건 이태원에서 올려다보는 캐릭터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앵글로 찍힌다. 꿈이란 현재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항상 올라가야 할 대상이란 것을 이용한 것. 즉 남산타워는 캐릭터들이 간절히 원하는 꿈이자 성공이다. 새로이 에게는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한 장가에 대한 복수. 이서에게는 새로이라는 정복해야 할 사랑의 대상. 근수에게는 이서라는 정복해야 할 사랑의 대상. 근원에게는 수아를 조수석에 앉히는 것. 수아에게는 이기적이면서 안정적인 삶의 행복. 장대희에게는 10층짜리 건물에 피붙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 꿈을 좇는 과정은 아름답기보다는 처절하고, 비겁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들을 모두 감내한다. 그 이유는 멀리서 바라본 남산타워의 화려함이 결국은 보상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근원의 말처럼 그 꿈, 그 성공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2. 성공 공화국, 대한민국

이태원 클라쓰는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성공에 대한 판타지를 캐릭터 곳곳에 꽤나 잘 녹여 놓았다. 장대희가 10층짜리 건물에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되는 시발점은 빈곤한 그 당시의 시대상황, 그리고 주변의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변의 의심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점화되는 것.

그렇게 꿈꿨던 것들이 현실에서 구현되어 성공을 이뤄냈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장대희. 그 과정에서 숱한 배신과 비겁한 짓들을 했지만, 그는 그를 의심했던 친구에게 지금 자신의 성공을 보라 외치며 만족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지금의 기성세대가 본인의 삶이 ‘좋은 삶’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위한 성공지상주의의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경주마 같이 앞만 보고 달리며 “성공했다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서 엄마의 모습도 그런 면에서는 근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똑똑한 이서가 잘 나가는 남들처럼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그러지 않자 이서 엄마는 이서를 내쫓는다. 하지만 이서가 사업적 성공을 거두자, 내가 그렇게 키웠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한다.

“성공했다면 됐어”

이런 기성세대의 성공지상주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전승된다.

사실 새로이가 말하는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은 장가에게 복수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요식업계의 1위가 되는 것이 장가에 대한 복수가 된다는 것도 비합리적인 사고. 덧붙여 복수를 완수하기 이전에는 수아와의 행복을 꿈꿀 수 없다는 것은 단적으로 경주마적인 성공지상주의의 모습.

근수도 마찬가지인데, 근수가 이서에 대한 정복욕구로 인해 흑화하는 모습은 개츠비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여성이 하나의 뒤틀린 아메리칸 드림이었듯이, 근수에게 이서는 뒤틀린 남산타워라고 할 수 있겠다. 이서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니까. 물론 근수에게서 보여지듯이 성공이란, 어찌 됐든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되겠다. 뭔가를 꿈꾸지도, 해서 자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근수가 삶에 있어 치열함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니까.

위대한 개츠비.png https://brunch.co.kr/@neuvilbooks/73


3. 자기 운명은 자기가 정한다, 성과주체의 딜레마

위에서 말했듯 성공은 무언가 치열함을 발휘하게 만든다.

교도소에서 승권이 어차피 전과자는 뭘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새로이는 자신의 운명을 속단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정한다고. 새로이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끊임없이 개발하려고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주체의 모습. 끊임없이 성과를 내서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개인들은 자신을 상품화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때 이들은 필연적으로 소진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성공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고, 성공에 도달한 후 목적지를 찾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만약 새로이가 장가에 대한 복수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언덕 위로 돌을 올리듯 그의 삶을 지속하다가 지치고, 결국 모든 인간의 운명처럼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장대희처럼 성공을 이뤘다고 해서, 그의 삶은 어떠한가? 그는 성공을 이룬 그의 장가를 위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소진은 없었으나.. 무엇을 위한 삶인가?)

성과주체의 딜레마란 성과를 내기 위해 삶의 동력을 얻지만, 그 성과가 이유가 됐을 때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이유가 공허해짐에 있다. 해서 성과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스스로가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교육을 하면서 애들하고 만나는 것 자체에서 만족하는 것. 그렇지만 나 역시도 그것에 만족이 안 된다. 애들이 변화해야 하고, 사회가 변화해야 의미가 있지. 그저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성과주체로서의 우리의 모습.

그저 음식을 파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팔아 얼마를 벌 수 있느냐란 성과에 집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뭐.

그래서 나는 성과주체이면서 풋살을 온전히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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