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어”
‘집’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누구에게나 집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그러기에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는. 그렇기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의 공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도 나를 다 알고 있다고 느껴지는. 온전히 나에게 맞춰진 공간. 그런데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병원이 집보다 편해요.”
일시적으로 만난 병원에서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은희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반면, 가족들은 집에서 은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오프닝 씬에서 자기 집 1002호가 아닌 902호로 찾아가 애타게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르는 은희의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은희가 애타게 집을 찾지만, 집을 찾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날갯짓하는 벌새임을 보이려고 한 것.
근데 집의 의미는 단순히 집이란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집의 메타포는 은희의 속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까지 확장된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한자 선생님 영지의 말처럼
“여러분이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영화가 시작되고 끝이 날 때까지 은희는 계속 그런 집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 한자 수업을 같이 듣는 단짝 친구 지숙, 풋풋한 첫 키스를 나눈 남자 친구 지완, 자기를 좋아한다는 후배 수희, 말없이 감자전을 부쳐주는 엄마,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것만 같고, 본받고 싶은 한자 선생님 영지.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런 집이 되어 주지 못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란 온전히 타인을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타인들만 그런 것일까? 갑작스러운 부모의 이혼을 말했는데도 본인 이야기만 하는 은희에게 단짝 친구 지숙이 던지는 한 마디.
“너, 가끔 네 생각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나 집을,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갈구하지만, 본질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줄 수 없는 존재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