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글을 쓰고 있다. 몰래라곤 하지만 심각한 밀서도, 애달픈 사랑편지도 아니다. 인턴을 하고 있는 회사에서 쓰고 있기 때문에 '몰래'일 뿐이다. 월급루팡이라고 비난하진 말아주시길. 지금은 일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럼에도 도의적으로 바빠 보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피피티와 브런치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게다가 자기 계발의 시간에 카피라이터 인턴이 글을 쓰는 건 장려될 만한 일 아닌가?-라고 합리화도 해 본다.
오히려 잘됐다. 이렇게 몰래라도 쓸 기회가 오다니.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딱히 쓸 만한 소재는 없어서 글쓰기를 차일피일 미뤘던 참이다.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어떻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걸까. 영감을 찾아서 하루에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할까.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몰래 하는 건 뭐든 재밌다는 사실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아닌가. 그래서라도 써야겠다.
하늘이 맑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광고대행사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말단 인턴한테도 일들이 쌩쌩 내달리는 풍압이 느껴진다.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정량화되지 않는 일, 수치화할 수 없는 노력이 각자의 자리에서 쌓여 간다. 때로는 낮도 밤도 잊은 채 보장 없는 노력이 계속된다. 그것들이 조용히 솜눈처럼 쌓여 하나의 완성된 안이 되는 건, 처음 봐서 그런지 몰라도 경이롭다.
바쁨이 미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바쁨은 잊어버리고 싶은 생각들, 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을 꽤 건강한 방식으로 밀어내 준다. 잡념이 안 든다고나 할까. 바쁠 때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바쁨이 일상이 되는 게 두렵기도 하다. 겨우 '찍먹'한 게 이 정도인데, 나가떨어지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을까. 걷는다 해도 좀비처럼 걷게 되는 건 아닐까. 광고계의 워라밸에 대해서 들었던 바는 많지만, 뭔가에 대해 들어서 아는 것과 경험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모두에게 당연한 이 바쁨이 낯설다. 거리를 가득 메운, 매일처럼 출근하고 야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며 평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어른이라는 말에 숨겨진 무게에 대해서도. 스무 살과 서른 살의 한가운데 서서 하기 딱 좋은 생각들인 것도 같다.
날씨가 좋으면, 출퇴근길은 예쁘다. 걷는 거리가 제법 되는 게 억울하지 않다. 출근길에 보는 구름과 키 작은 건물과 그늘진 나무와 햇볕은 여름의 시간처럼 세상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퇴근길, 출근길 반대편에서 바라본 길은 노을로 옅게 물들어 있다(야근한 뒤면 풍경이고 뭐고 생각 안 들지만). 열기가 사그라든 도로는 따뜻하게 덥혀져 있어, 에어컨 바람 아래서 차가워진 몸이 기분 좋게 녹신해진다.
어느덧 퇴근이 머지않았다. 퇴근 후 이어질 한가로움이 축복 같다. 내가 아무리 무뎌지고 무뎌져도 퇴근의 기쁨마저 느끼지 못할 만큼 무뎌지진 않겠지. 애초에 무뎌지기도 힘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