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담그셨나요? 저는 해마다 쌀쌀한 손돌바람이 부는 소설 절기, 11월 마지막 주에 김장을 담급니다. 올해도 날씨가 알맞춤하게 추워졌어요. 너무 포근한 날씨에 김장을 담그면 왠지 제 맛이 안 날 것 같은데다행이에요.
김장을 담글 때면 꿈처럼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습니다.
어지간한 부엌일은 혼자 하는 걸 편안해했던 친정 엄마는 김장을 담글 때도 아들딸의 손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걸리적거린다고 방에 들어가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하셨지만, 엄마 주변을 맴돌았던 건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어서였지요. 엄마는 "너무 많이 먹으면 배 아프다"라고 경고하면서도, 잘 절여진 노란 배춧잎에 빨간 양념을 올린 쌈을 커다랗게 싸서 순서대로 삼 남매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다음날이면 삼 남매가 순서대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요.
엄마는 막내딸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곱게 자라기를 바라며 부엌에서 밀어냈지만, 그런 엄마의 과잉 애정의 결과로 전 부엌일에 완전 젬병인 채로 수녀원에 입회했지요. 그리고 <내가 정말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 제목처럼, 저도 부엌일은 물론 빨래, 청소, 재봉 등 살면서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수녀원에서 배웠습니다. 김장도 그 중 하나죠.
해마다 11월 30일로 못 박아 놓고 했던 수녀원 김장은 2천 포기.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오면 수녀님들은 개미떼처럼 일사불란하게 배추를 주방 옆 마당으로 옮겼습니다. 수녀님들의 손에 낀 빨간 고무장갑은 무채색 수도복이라 더욱 눈에 잘 띄었지요. 그렇게 많은 분량을 해도 김치 맛은 늘 똑같았는데요, 푹 익은 김치로 끓여주셨던 김치찌개는 수녀님들의 최애 소울푸드였습니다. 그 큰 일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진두지휘하셨던 주방의 할머니 수녀님. 지금은 천국에 계시는 수녀님도, 수녀님의 김치찌개도 참 그립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다 쓸 수는 없습니다만, 김장의 추억은 끝이 없습니다. 어린이집 부모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담갔던 때, 농사지은 배추를 뽑고 다듬으며 텃밭 농사를 괜히 해서 사서 고생한다고 후회했던 때, 동료 교사들과 함께 워크숍을 겸하며 담느라 이중으로 바빴던 때 등. 언제나 손발이 시렸고 옷을 껴입었어도 차가운 칼바람에 얼굴은 얼었지만, 떠들썩한 웃음과 대화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는 정겨운 장면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돌아갑니다.
저 역시 일손을 돕겠다는 딸내미를 걸리적거린다는 말로 밀어내고 김장을 담습니다. 껍질을 까는 데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마늘은 진작에 준비해서 얼려 두었고, 쪽파도 틈틈이 손질합니다. 우리 집 고양이들은 희한하게도 파를 좋아하네요. 냄새를 맡기도 하고, 입질을 해보기도 하더니 아예 앞에 주저앉습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라는 말을 하고픈 걸까요?
재료 하나하나를 생각하니, 우리 집 김장을 위해 참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정신을 따라 살기 위해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산 위의 마을] 공동체가 정성스레 키워 준 마늘, 괴산에서 유기농 농사를 고집하며 뙤약볕 아래 키워 준 고추, 해남에 사는 지인이 잘 키운 배추를 바닷물로 절여 깨끗이 씻어 보내 준 절임배추.
생새우와 굴을 사러 간 재래시장 어물전 사장님은 흑백요리사에 나온 레시피대로 먹어 보라며 홍합과 조개류를 한 봉지 가득 덤으로 줍니다. '앞사태살'이 수육을 하면 부드럽다고 권해 주는 동네 정육점 사장님도 찌개감 고기를 얹어 주시며, 김장을 맛있게 하라는 덕담을 아끼지 않으시네요.
가족들 역시 분주합니다. 양념을 만들고 속을 넣는 일은 제가 하지만, 옆에서 치우고 쓸고 닦는 일을 감당해 준 남편. 수업 끝나고 일부러 일찍 들어와 준 아들과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 준 딸. 가족들의 응원 덕분에 서른다섯 포기 김장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생했다며 어깨도 주물러 줍니다.
일 년에 한 번, 우리 집 김치와 수육 맛을 기다리는 이웃집에 한 접시씩 나누기도 했지요. 늦은 저녁밥상에 둘러앉아 식사 전 기도를 하다가, 오늘 기도에는 특별한 주문을 덧붙입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들을 강복하소서..... 그리고 김장 맛있게 익게 해주세요."
아무리 레시피를 적어 둔다고 해도 배추 맛도 다르고 양념 맛도 다르기에 해마다 김장 맛이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분들이 보내준 재료와 제 수고로움에 더해, 오래된 김치냉장고의 성능이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행운도 있어야 하고요,밖에 내놓아 익히는 건 적당한 날씨와 기온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주기를 바랄 수밖에요.
보이지 않는 분들의 노고와 기도의 힘까지 보탰으니, 우리집 김장은 올해도 맛있을 겁니다!!!
올해는 첫눈으로 폭설이 내렸습니다. 언니가 보내준 사진을 보니 어제는 가을이었는데 오늘은 한겨울이네요. 제가 사는 이곳에도 첫눈이 제법 왔지만, 쌓이지 않고 다 녹아 버렸어요. 눈이 오다가 비가 되기도 하는 절기. 눈이 오면 한겨울이요, 날씨가 푹하면 다시 만추(晩秋)로 돌아가는 시기. 이렇게 가을과 겨울이 오묘하게 겹쳐 있는 마지막 절기가 소설 아닌가 싶네요.
서울은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다네요.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그동안 이어지던 연중시기는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마무리되고, 이 절기에 대림시기가 시작되곤 한다. 대림절은 '이미' 오셨으나 '아직' 오지 않은 분을 기다리는 시기라서 그런지, 시작이요 마침인 시기로 여겨진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듯 한 해의 마침과 새로운 전례력이 교차되는 시기. 죽은 영혼을 추모하는 위령성월이 가고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 그래서 설렐 수밖에 없는 시기.
11월 30일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성인이나 수호천사를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나는 안드레아 사도를 '김장 담그는 이의 수호성인'으로 정할 텐데. 서양판 조왕신이라고 할까. 김치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 나오려면, 성인의 전구든 수호천사의 힘이든 다 빌려와야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