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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흙을 발라주시지

재의 수요일 / 대문사진 -픽사베이

by 글방구리 Mar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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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이 되면서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평일 미사에 잘 가지 않아도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만큼은, 그리고 일 년에 한 번밖에 하지 않는 재의 예식을 받으려면 이런 날은 꼭 챙겨서 가고 싶어진다. 고통, 수난, 십자가, 죽음, 보속, 회개, 단식, 자선, 희생 등.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반갑지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주제들을 앞으로 사십일 동안은 붙들고 살아야 한다.


작년 성지주일에 받아와 십자가 뒤에 걸어 놓았던 잘 마른 나뭇가지는 한 그릇의 고운 재로 변신하여 제대에 놓인다. 사제는 성수를 섞어 되직하게 만든 뒤, 신자들의 이마에 바르며 말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고, 또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라고. 둘 중에서 어떤 문장을 말할지는 사제의 선택인 듯한데, 나는 후자보다 전자를 더 많이 들은 것 같다. 올해도 역시나.


얼마 전 본당에 부임하신 주임 신부님은 얼핏 보아도 무척이나 신심이 깊어 보이신다. 내적인 신심이야 알 수 없으나, 전례를 집전하시는 태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혀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기도문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발음하듯 말씀하시는 것을 봐도 그렇고, 말씀의 전례 때 매일미사 책을 들여다보지 말고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시는 것을 봐도 그렇다. 작은 것 하나하나 꽤 신중하게 챙기시는 느낌이다.


그런데, 으악.

올해 같은 재의 예식은 육십 년 만에 처음이다. 신부님은 예식을 행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듯 말씀하셨다. "저는 이마에 십자가를 크고 진하게 그릴 거랍니다. 재를 받으면 휴대폰을 꺼내 셀카를 찍으세요. 그리고 사순절 기간 동안 휴대폰 배경화면에 저장해 놓고, 시시때때로 '나 이래 봬도 재 받은 사람이야.'라고 사람들한테 말하세요." 그리곤 진짜 이마에 새까만 십자가로 아스팔트를 깔아 놓으셨다! 각자 자기 이마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 이마를 보면서 웃참하느라 난리가 났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찰칵찰칵 셀카 찍는 소리도 요란하다. 성당에 아는 사람이 없어 키득댈 수는 없던 나는 이마에 재를 받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느낌보다는 왠지 마귀나 귀신이 나오는 호러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섬뜩함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마도 발라주신 재가 엄청 차가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신부님은 하루종일 씻지 말라고 하셨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른 세수를 했다. 문득 우리 부모님을 화장하면서 보았던 흰 뼛가루가 생각난다. 죽음을 기억하려면 진짜 뼛가루를 발라주시는 건 어떨까, 하는 호러 영화 주인공 같은 생각을 잠깐 했다. 아니면, 이런 새까만 재보다는 진짜 내가 돌아갈 흙을 발라주시는 것도 좋았겠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저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걸 기억하기는 할 건데요, 먼지 날리는 회색빛 재나 콜타르 같은 시커먼 재보다는 포슬포슬한 진짜 흙을 발라주시면 어떨까요. 꽁꽁 얼었던 흙도 풀리고 우리가 영원히 죽어 없어질 거는 아니잖아요. 흙 속에서 새싹이 트듯이 새 생명을 주실 거잖아요. 그러니 기왕에 바르시려거든 흙을 발라주시와요.'

새까만 십자가 무셔워, 내 얼굴은 더 무셔워ㅜ새까만 십자가 무셔워, 내 얼굴은 더 무셔워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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