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죽음이란

2022년 6월 3일 / 재에서 왔으니 재로 돌아가리라

by 글방구리

나이 들면서 가장 자주 예상하고 준비해 온 일이면서도, 막상 직접 맞딱드렸을 때는 매우 당황스럽고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부모의 죽음인 것 같다. 부모가 아닌 내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별로 아깝지 않게 느껴질 나이가 되어 부모를 보내게 되었는데도, 한 사람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일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는 제법 의연하게 해낼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던 시간을 보냈다. 죽음이 낯선 것이 아니라 부모의 죽음이기에 그럴 거라고 생각해 본다. 부모가 둘이기에 망정이지, 열 명쯤 되었더라면 어찌할 뻔했나.


아버지가 이른바 '중풍'이라고 하는 뇌졸중으로 오른쪽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때는 정년퇴직을 반 년 남겨둔 시점이었으니, 지금 내 나이와 엇비슷하다. 엄마는 그때 나보다 젊은 나이였는데, 십 년 정도 아버지 병수발을 하다가 64살-지금 생각하니 한창 때인-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그후 17년이 흘렀다. 며느리가 한동안 엄마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홀로 된, 게다가 괴팍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시아버지를 며느리가 수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7년 동안 아버지를 24시간 돌봐줄 간병인이 얼마나 여러 번 바뀌었는지. 우리 형제들은 그것을 '간병인 잔혹사'라고 말한다.

한쪽을 못 쓰긴 했어도 정신은 말짱했던 아버지는 결국 코로나라는 암초에 걸려 더는 생을 이어가지 못하셨다. 아니, 코로나는 그냥 계기에 불과했을 뿐, 노환과 기저질환으로 이미 입맛을 잃으신 지 두어 달 되었던 차여서,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했고, 잔인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렸다.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기다렸다고 하면, 아버지 스스로 장례비용이라고 마련해 꼭꼭 싸매둔 돈을 홀라당 집어가 버린 간병인보다도 더 잔혹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머잖아 가실 분은 잘 가시도록, 되도록 병석에서 오래 고생하시지 않고 평안히 가시도록 빌어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 날을 기다렸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을 줄 알았다. 오랫동안 예상했고, 상상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므로. 그래서였을까, 슬프기보다는 그저 아팠다. 아버지라는 한 사람의 생을 돌아봐도 아팠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물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우리 형제들과 사흘동안 지내면서도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정신이 없었던 5월을 보내고, 엊그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조문이니, 빈소니, 화장이니, 유품이니 하는 칙칙한 어둠의 세계에서 지내다가 다시 돌아와 맞은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푸르렀다. 텃밭의 고추와 토마토도 튼실하게 자라 어느새 열매를 조롱조롱 매달고 있었고, 세 마리의 고양이도 그들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다시 만나는 날. 오랜만이라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수업에 늦지 않던 은희가 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조금 전에 마당에서 놀고 있었단다. 무슨 일일까 싶어 나가 보니, 은희가 눈가를 비비며 눈물을 닦고 있다.

"왜, 은희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인가 싶어 어깨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내가 키우던 누에가 죽었어."

그랬구나. 글쓰기 수업을 처음 시작하던 날, 집에서 키우던 누에 이야기를 재미나게 써왔는데, 그 누에가 죽었구나. 나는 나를 키웠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너는 네가 키우던 누에가 죽었구나. 우리 둘 다 상실의 슬픔을 겪고 있구나.

은희를 달래면서 데리고 들어온다. 오늘 글쓰기 주제를 바꾸기로 한다. '내가 겪은 죽음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너무 무거운 주제가 아닐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더욱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모습을 슬퍼하던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라면 한 번쯤은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겪을 자기 마음을 가늠해 보았을 거고, 어릴수록 그 아픔이 두렵고 무서웠을 수도 있는데, 이런 주제로 글쓰기를 하게 해도 될까. 그러나 아이들에게도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이 키운 사슴벌레가 있고, 누에가 있고, 강아지가 있고, 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실 테니.


글쓰기 수업에 오는 다섯 명의 아이들은 모두 죽음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은희는 역시나 오늘 경험한 누에의 죽음에 대해 생생하게 썼다. 만약에 지옥에 간다고 해도 자기에게 주어질지도 모르는 1년의 1초를 누에를 보기 위한 시간을 쓰겠다니, 은희가 키운 누에만큼 세상에서 행복한 누에가 또 있을까.


오늘 내가 키우던 누에가 죽어버렸다. 어제, 아니 오늘 이른 아침 즉 8시쯤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많이 속이 상했다. 누에가 죽으니 바닥에 노란 물 같은 게 있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데 그 수컷 누에는 천국에 갈 것 같다. 지금까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되긴 했지만 나와 친한 친구가 되어 주고, 내가 주는 음식도 잘 먹어 주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도 죽어 천국에 가게 되면 그 누에와 함께 행복하게 놀 것이다. 내가 지옥에 가도 1년에 1초라도 천국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꼭 천국에 갈 것이다. 누에야, 우리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꼭 다시 만나자. 그리고 다음 생에도 우리 꼭 천국에 오자.(은희)


평소에 장난이 심한 민재도 죽음 앞에서는 자못 심각하다. 아니,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는 민재의 태도는 철학적으로 보인다. 외동이인 민재는 부모(가족)의 죽음을 상상하면 자기도 죽을 만큼 슬플 것 같다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죽으면 착하면 천국에 가고 나쁘면 지옥에 갈 것 같아요. 아니면 다시 태어나나 모르겠다.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천국에 갈까 아니면 지옥에 갈까. 천국은 있을까. 그러고 지옥은 있을까. 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지옥에 가면 거기에 또 무엇이 있을까. 천국 아니면 지옥이 없다면 다시 태어날까. 지옥은 무섭고 천국은 안 무서울 것 같다. 다시 태어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보통이면 중간에서 있을까? 지옥에 갈까 아니면 천국에 갈까 아니면 다시 태어날까 어디로 갈까. 왕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할아버지 마음은 어떨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 아빠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얼마나 슬플까. 엄청 슬플 것 같다. 얼마나 힘들까. 가족이 죽는 건 무서운 것 같다. 그러고 슬픔을 못 이겨내고 나도 죽을 것 같다. (민재)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자리에 들 때까지 아버지는 온종일 휠체어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혹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고 시간을 보내셨다. 아버지에게 코로나를 옮겨주고 자신도 격리에 들어간 마지막 간병인이 떠난 빈 집에서 뻐끔거리던 작은 물고기들. 언니는 그걸 보고 있으면, 멍하니 어항만 들여다보던 아버지 생각이 날 것 같아 도저히 못 가져가겠다고 했다. 언제 고양이 밥이 될지 모르지만, 빈 집에서 굶어죽게 할 수는 없어 어항째 싣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아침 저녁으로 밥을 주면서 잠깐씩 '물멍'을 한다. 물고기를 보면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와 잠시 눈길을 마주친다. 이제는 하느님 곁에서 편안히 쉬시라고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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