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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18. 2024

남편이 또 노트북을 사 왔다!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은 후에 커피를 내리면서 남편이 말했다.

 "자기를 위해서 산 게 있는데 오늘 도착할 거야."

 "응? 뭔데?"

 "알아맞혀봐."

 나는 머릿속으로 남편이 나에게 선물할 만한 것을 생각했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편은 요즘 바빠서 다른 일을 생각한 겨를이 없다. 그런 남편이 나한테 주려고 산 것이 뭘까?

 "커피? 옷? 반지?"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막 던지기 시작했다. 사실 남편은 나에게 선물을 잘하지 않는다. 대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라고 현금을 준다. 선물을 했다가 마음에 안 들면 돈만 아까우니까 그동안 기념일에 현금으로 마음을 전했다. 그게 나도 좋았다. 그래도 가끔 남편이 뭔가를 나를 위해 살 때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니고 결혼기념일도 아니다. 선물을 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날이다.


 "만약에 뭔지 맞히면 내가 하나 더 사줄게. 아니 그건 안 되겠다. 암튼 맞히면 다른 선물도 줄게."

 어라? 뭐지? 남편이 이렇게 얘기하니까 거창한 뭔가가 나올 것 같다. 세게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이 가방에는 명품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남편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진짜? 명품가방이라고? 나는 속으로 설마 이 남자 사고 친 거 아닌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가끔 명품가방 하나 사면 어떨까 생각은 했지만 진짜 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그것을 사 왔다면 나는 반품하고 싶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선물이니 반품하기도 힘들고 냉가슴만 앓을 것 같아 걱정이었다. 다행히 남편은 가방은 아니라고 했다.

 "노트북?"

 나는 무심히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막 던진 말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남편이 말했다.

 "노트북 맞아. 자기 쓰라고 샀어."

 "왜? 내 노트북 고장도 안 났는데? 10년밖에 안 된 노트북을 왜?"

 "뭐야? 10년이나 썼다고 시위하는 것 같은데? 자기 노트북 용량이 낮아서 못하는 게 많잖아. 오래 쓰기도 했고."

 "난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난 원래 한글만 있으면 돼."

 "그건 아는데 오래 썼으니까 바꾸면 더 편할 거야."

 츤데레기운이 솟구친다. 이 무심한듯한 다정함이란 무엇이지. 머릿속으로 오늘 온다는 노트북의 가격을 예상해 봤지만 도무지 감이 안 왔다. 그쪽으로는 전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은 역사가 깊다. 이 노트북을 산 것은 순전히 스타벅스 때문이었다. 아들을 아기띠에 안고 다닐 무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경조사에 다녀오는 길에 신도림에 있는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정말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간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스타벅스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이와 카페에 가긴 했지만 대개는 집 근처 작은 카페였다. 그날 카페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일행과 함께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혼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혼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쓰거나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부럽고 좋아 보였다. 아이가 있어서 편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힘들었던 그날, 나는 노트북이 갖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남편이 지금의 노트북을 사줬다. 한글만 쓸 수 있으면 된다는 말에 용량이 크지 않지만 튼실한 노트북이 나에게 왔다. 노트북을 받아 든 나는 너무 신나서 들다가 한번 켜보지도 않은 것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무로 된 거실바닥이 패일 정도로 세게 떨어졌다. 그런데도 노트북은 멀쩡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장 한번 안 나고 잘 사용하고 있다. 한 번은 여행길에 가지고 간 노트북을 길에 두고 올 뻔했다. 남편이 잠깐 쓸 일이 있다며 가져갔다가 벤치에 올려두고 온 것이다. 나중에 같이 간 일행이 찾아줘서 노트북이 미아가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노트북은 온통 내가 쓴 말도 안 되는 습작들로 도배되어 있는 데다 비밀번호도 걸려 있지 않았다. 노트북 잃어버린 것보다 누가 내 글 보는 게 더 창피했다.


 지금까지 노트북을 가지고 스타벅스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당시에는 아이 돌보느라 사실 집에서도 노트북을 펼쳐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일하거나 공부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했을 노트북을 허세 가득한 애기엄마가 산 것이다. 그리고 집에 장식으로 두었다. 오랫동안. 그리고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노트북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글을 써서 책을 펴내고, 상을 받고 소설가로 등단을 했다. 지금은 노트북으로 브런치에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10여 년 동안 노트북에는 시간이 쌓이고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나의 역사가 되었다. 용량이 적어서 한글과 크롬 외에 모든 프로그램을 다 지운 상태지만 정이 많이 든 노트북이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코로나 때도 남편이 재난지원금으로 바꿔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구글 드라이브 사용법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남편에게 물었다. 그때 용량 때문에 강의자료나 문서들을 USB에 옮겨 담는 것을 본 남편이 노트북을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문서들을 다른 곳에 옮겨 담아도 불편한 줄 몰랐는데 남편 눈에는 번거롭게 보인 것이다.


 오후에 새 노트북이 왔다. 그 전의 파란 노트북과 달리 은색의 고급미가 흐르는 것이 멋지다. 솔직히 있어 보인다. 옛 친구한테 미안하게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간다. 남편이 새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깔아준다. 넷플릭스도 볼 수 있단다. 세상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밀리의 서재도 깔고 유튜브로 음악을 들려준다. 소리가 듣기 좋다. 게다가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그동안은 한글 프로그램 여는데도 과장 보태서 커피 한잔 내리는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클릭하면 바로 열린다. 윈도우 11로 업그레이드가 안 돼서 8.0 버전으로만 사용했는데 드디어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단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마음속으로 노트북의 가격을 묻고 싶은 경박함을 누르고 지금의 기쁨을 충분히 즐기기로 한다. 그동안 용량 때문에 따로 저장했던 문서들이 돌아왔다. 노트북에서 문서를 바로바로 찾을 수 있다니 편하긴 하다. 그래도 옛 노트북이 서운할 수 있으니 대놓고 좋은 척은 참는다. 남편에게 감동과 감사를 수줍게 보낸다. 왜 웃음이 활짝 나오지 않고 배시시 나오는지. 옆자리에서 말없이 떠나는 나를 보고 있는 파란 노트북에 대한 미안함일까? 더 좋은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부채감 때문일까? 앞으로 10여 년, 새로운 노트북에 새로운 이야기가 쌓일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 그 행복한 기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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