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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Aug 21. 2024

지하철의 온도 2

밤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이제 더위가 조금 꺾이려나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기대는 무너졌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는 창문밖 풍경과 달리 더웠다. 에어컨을 켜고 아침을 챙겨 먹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습기가 나를 덮쳤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오늘도 더위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이 따라 나왔다. 비가 많이 오니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괜찮다고 했지만 차키를 들고 나오는 남편을 더 말리지 않았다. 지하철역까지 버스 한 정거장, 걸어가면 지하철역에 도착하기 전에 땀이 쏟아진다. 오늘은 편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더운 습기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차 갖고 올걸 그랬나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가 지하철 밖, 움직이지 않는 차들을 보면서 지하철에 타고 있는 것에 안도했다. 서울은 정말 무시무시한 곳이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내 몸에서 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대로 더운 공기, 후덥한 습기 그 자체 같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름이 지겹기는 처음이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고 더위에 강하다는 자신감이 무너졌다.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정오까지 내리던 비가 그쳐있었다. 비가 그치자 습기와 더위가 더 강해졌다. 내 몸에서 수증기가 나올 것 같은 더위, 몸을 스치는 옷이 거슬렸다. 지하철역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시원한 커피라도 마시고 싶었다.

 "아이스 아케리카노 한 잔 주세요."

오랜만에 키오스크가 아닌 사람에게 하는 주문이었다. 주문을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당떨어진 것 같아서 달달한 라테를 시킬까 고민하다가 아메리카노가 더 시원할 것 같아서 마음을 바꿨다. 그래도 뭔가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서 지하철역 자판기에서 초콜릿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커피를 준비하던 사장님이 작은 선풍기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내 앞에 켜 주셨다. 작은 선풍기지만 꽤 시원했다. 더군다나 두 개나 준비해 주신 덕에 더위가 날아갔다. 그렇게 말없이 선풍기를 켜 주시고 사장님은 쿨하게 다시 커피를 준비하셨다.


잠시 후, 갑자기 사장님이 뭔가를 내밀어서 보니 초콜릿이었다. 뭐지? 아까 내가 초콜릿 사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게 들렸나? 사장님이 독심술이 있나 싶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이번에도 말없이 다시 커피를 준비하시는 사장님. 쿨내가 진동한다. 잠시 후에 사장님은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가득 담긴 컵을 내미셨다. 여전히 별말씀은 없으셨다. 나는 커피를 받고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훅 하고 들어오는 지하철역의 습기가 덥지 않았다. 따뜻한 사장님 배려에 마음이 시원해졌다.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머리가 띵하게 시원했다. 사장님이 주신 초콜릿을 먹으면서 이 지하철 왜 이렇게 시원하지? 여기 커피 왜 이렇게 맛있지? 생각했다.


나는 카페를 좋아한다.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찾아가서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커피보다 풍경이 멋진 카페도 좋아한다. 나에게 카페는 도시가 아니다. 강이 있고 산이 있고, 심지어 밭이나 논 앞에 있는 카페를 일부러 찾아다닌다. 그런데 요즘 지하철역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맛이 너무 좋아서 놀랄 때가 많다. 거대한 기계덩어리의 길목, 그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따뜻한 한 끼를 팔고 있다. 누군가는 향기 가득한 커피를 팔고 있다. 지쳤냐고 묻는 글 옆에 조금만 더 힘내보라고 응원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너무 더워서 들른 카페에서 많이 더운 거 안다고 선풍기를 켜 주시는 손길을 만났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들 한다. 정말 세상에는 이상하게 좋은 분들이 많다. 그들이 장삿속으로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심한, 영혼 없는 멘트하나 없는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더위, 쏟아지는 폭우조차 막지 못한 더위에도 지하철은 오늘도 시원하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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