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Feb 28. 2021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모유수유

모유수유의 최대 수혜자는 엄마다.

출산 전부터 나의 육아 키워드는 애착이었다. 아들에게 애착육아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모자동실을 예약하고, 산후조리원은 생각도 안 했다. 산후조리원 비용이 많이 비싼 것이 내 결심을 확고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간단한 신체검사가 끝난 또미는 2박 3일의 입원기간을 엄마 아빠와 함께했다. 모유수유 전문가의 도움으로 첫 모유수유를 시도했다. 나는 자신 있었다. 열 달 동안의 임신기간 동안 보건소에서, 그리고 책을 통해서 꼼꼼히 배워뒀기 때문에 모유수유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겠다는 그 동물적인 욕구에 장애물이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유수유는 실전이었다. 실전은 항상 이론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또미의 몸은 마시멜로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았고, 또미의 작고 여린 입술에 닿기에 내 몸은 너무 거칠어 보였다. 배운 대로 유륜을 또미가 다 물게 하고 싶었지만 또미의 입술은 손으로 만지기도 아까울 만큼 작고 여렸다. 태어나면 스스로 기어가서 엄마젖을 무는 강아지와 다르게 또미는 엄마 아빠, 그리고 모유수유 전문가의 도움에도 어려워했다. 고작 한 번의 시도로 남편과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리고 나는 곯아떨어졌다. 24시간을 진통했으니 기절한 것이 당연했다. 또미도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미는 계속 울었다고 남편이 말했다. 나는 또미의 울음소리를 전혀 듣지 못할 만큼 기절한 상태였다. 모유수유 전문가는 2시간에 한번 찾아와서 수유를 도와줬고. 배고픈 또미는 그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엄마를 반겼다. 힘들고 느렸지만 분명 또미와 나는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어설픈 엄마에도 불구하고 또미는 먹고 자고 쌌다. 또미의 똥만 봐도 우리는 신기해서 감탄했다. 모유수유를 완벽하게 해 내지 못했음에도 퇴원 시간은 왔다. 그런데 병원에서 퇴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2박 3일의 기록에 또미가 똥을 싼 기록은 있지만 오줌을 싼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꼬박꼬박 기저귀를 갈고 기록하면서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또미의 건강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퇴원할 수 없다고 했다. 모유가 부족한 것 같다며 간호사가 분유를 권유했지만 또미는 분유를 거부했다.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오줌을 싸기를 기다리면서 입원해 있을 수도 없었다. 


또미에게 이상이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온다는 약속과 또미가 집에서 오줌을 싸면 알리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상이 있어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 우리는 퇴원을 하고 집으로 왔다. 또미를 안고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두 사람이 사는 공간이 세 사람이 사는 공간이 되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벅찬 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또미는 첫 오줌을 쌌다. 약간의 피가 함께 나왔지만 병원에서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또미도 집이 편했던 모양이다.


이제 우리 셋이서 해내야 했다. 그동안 배운 대로, 병원에서 배운 것까지 더해서 나는 더 이론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모유수유는 장난이 아니었다. 블럭버스터급으로 전개되는 하루하루였다. 모유수유가 익숙해지자 젖몸살이 찾아왔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책에서 읽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자주, 이렇게 오래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책에서 짧게 설명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통이었다. 젖몸살이 오면 또미가 모유를 거부했기 때문에 마사지를 해서 풀어주어야 했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직 또미와 내가 함께 해야 했던 힘든 시간들이었다.


염증이 생겨서 병원에 갔을 때였다. 모유수유 전문가가 바늘을 들고 나를 덮쳤다. 사실 고름을 터뜨리려고 소독한 바늘을 들고 헐벗은 나에게 다가왔는데 그때 기분이 그랬다. 이 여자가 나를 바늘로 위협하고 덮치려는구나. 내가 바늘에 매우 약하다는 것을 이 여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짧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바늘로 고름을 터뜨리고 나서 시원하게 고름도 낫고 젖몸살이 풀렸지만 내가 얼마나 바늘을 무서워하는지 그분에게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을 만큼 공포의 시간이었다. 다행히 6개월이 지나자 젖몸살도 없어졌다.


출산만큼이나 힘든 모유수유지만 그 이상의 행복을 줬다. 모유수유는 아기를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내 몸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최초의 시간부터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가 나한테도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지구를 살게 하는 역사의 한 줄기가 된 것 같았다. 또미에게 수유를 하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이 알 수 없는 환희에 차올랐다. 내가 또미에게 수유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또미가 나에게 기분 좋은 뭔가를 전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꽤 맛이 있는 모양이었다. 또미는 꿀떡꿀떡 소리를 내며 맛나게도 먹었다. 얼마나 맛이 있으면 분유를 거부했을 정도였다. 또미가 오줌을 누지 못했을 때 분유를 먹이려고 했지만 한번 모유 맛을 본 탓인지 또미는 거부했다. 엄마젖을 먹고 나면 또미는 너무 힘들어서 바로 지쳐 잠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좋았다. 하지만 분유는 힘들이지 않아도 콸콸 쏟아지는데 또미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내가 이 지역의 모유 맛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유수유의 최대 수혜자는 나였다. 또미에게는 한 끼 식사였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의 편리함과 기쁨을 주었다. 또미가 배가 고파서 히잉 하고 울려고 시동을 걸면 나는 바로 또미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경우에 또미는 울음을 뚝 멈췄다. 이 모습을 보고 남편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또미가 울 때 안아서 달래 보겠다던 남편이 결국 포기하고 내 품에 또미를 넘기면 또미는 젖 냄새를 맡고 벌써 좋아했다. 젖병을 소독하거나 분유가 떨어져서 따로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한밤중에 모유는 더 빛을 발했다. 또미가 가장 길게 자는 시간은 고작 40분이었다. 신생아가 하루 20시간을 잔다고 보건소에서 그랬는데 깨어있는 시간이 20시간인데 반대로 알려준 게 분명했다. 엄마젖을 먹고 지쳐 잠들어도 눕히면 길어도 20분이면 다 잤단다. 새벽에도 수시로 깨는 또미를 먹이고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데 그중 가장 편한 것이 수유였다. 불 끄고 누워서도, 앉아서도 바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작은 불빛에도, 불을 끄는 스위치 소리에도 깨는 또미에게 분유를 먹이기 위해 수선을 피우면 아마 상상하기 싫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모유수유의 가장 큰 장점은 외출이다. 외출할 때 나는 기저귀와 물티슈만 있으면 준비 끝이었다. 어차피 외출이라고 해도 대개는 동네 마트가 전부였기 때문에 또미가 배고프면 수유실로 가면 그만이었다. 수유실에는 수유 동지들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초면에 가슴을 드러내고 몇 개월이에요? 를 시작으로 수유실 회담을 시작한다. 모유수유로  나의 낯가림을 고친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  


나는 22개월 동안 모유수유를 했다. 책에서는 모유 권장 기간이 24개월이라고 했다. 주변에서는 거의 돌을 전후로 단유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모유를 끊지 못한 것은 아마 또미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또미가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수유 양은 현저히 줄었다. 아마 그때는 배부른 수유가 아니라 편안한 수유였던 것 같다. 또미와 나의 힐링타임 같은 거였다.


단유 한 달 전부터 또미에게 매일 알려줬다. 이제 또미가 많이 자라서 단유를 할 생각이야. 한 달 후부터는 엄마 젖을 그만 먹을 거야. 29일 후에는 엄마 젖을 그만 먹을 거야. 28일 후에는 엄마젖을 그만 먹을 거야. 그렇게 한 달 후에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단유에 성공했다. 또미는 젖을 찾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나였다. 처음 단유 했을 때 많이 허전하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또미보다는 내가 분리불안에 힘들었다. 더 이상 또미에게 내가 필요 없는 것 같은 생각에 마음 한편이 허전했고, 그 허전함은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역시 모유수유는 엄마를 위한 것이었다.


단유를 하고 나는 한동안 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유수유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생각했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생각했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생각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처음으로 맛본 황금기였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는 또미와 함께 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다시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나에게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항암치료로 인해 폐경을 선고받았다. 아들이 4살 때였고 내가 38살 때였다. 간절히 바랄 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 인생의 잔인함에 나는 완전히 승복했다.  


수유 동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째를 낳았다. 친구들을 보며 동생이 갖고 싶다는 아들에게 나는 동생은 분명 엄청 신포도일 거라고 말했다.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분명 둘째를 키우는 것은 첫째를 키우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오늘도 아들이 나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물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이전 05화 또미는 엠블런스를 타고 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