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로 여행을 간다면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막내는 어리광인지 진심인지 모를 힘들다를 달고 살았다. 내가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로 위로를 했다. 뭘 하고 싶느냐는 질문에 여행 가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행이 위로가 된다면, 견디는 힘이 된다면 여행을 가보자. 그리고 여행지는 체코로 정했다.
mbti 대문자 P인 나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이 하기 싫은 숙제여서 딸내미들에게 미루기 일쑤다. 아직은 내가 갑이라 아이들이 숙고해 짜놓은 계획에 몸을 맡기고 ‘가주는’ 여행인 덕분이다. 하지만 체코는 내가 계획을 짜보려고 한다. 체코는 특별하니까.
체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전혜린, 그녀는 독일로 유학을 갔지만 체코에서의 추억이 더 강력하게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책은 사라졌고 기억은 희미해졌으므로 어디를 가야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물론 흔적을 찾고자 하는 여행도 아니다. 하지만 체코를 다녀오면 무지막지하게 그녀의 책을 정리해 버린 나의 무정함도 조금 사라질 것 같다.
원칙은 딱 하나다.
천천히 오래 걷고 많이 보기보다 자세히 볼 것.
동화 속 성을 보러 프라하성으로 간다. 프라하성은 성이라기보다 작은 마을로 , 성 비투스 대성당, 성 이르지 성당, 연금술사들이 살았던 황금소로, 왕실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공주님과 왕자님, 요정이야기를 읽으며 상상했던 궁을 보는 즐거움을 느껴봐야겠다.
500m에 달하는 카를교는 끝까지 걸을 수가 없다고 한다. 너무 아름다운 경치에 홀려 걸음을 멈추게 한다고 하니 빼놓을 수는 없다. 나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히 해가 지고 난 후 프라하성이 노란 불빛으로 가득 차오르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차오르겠지. 카페보다 가로등아래에 서서 가슴을 열고 블타바강의 물소리와 공기의 온도를 느끼며 오랫동안 바라볼 것이다.
꼭 가보고 싶은 작은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도 갈 계획이다.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매우 작은 마을이란다. 붉은색 지붕과 돌로 된 바닥, 나무로 둘러싸인 강이 유유히 흐르는 동화 같은 중세 마을,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속 마을을 넋을 잃고 보고 있으면 잃어버린 순수의 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멈춘 그곳에서 아날로그의 여유를 찾아보자.
여행을 가면 현지의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벌써 50년 도 더 된 전혜린 님이 유학시절,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칠 때 먹었다는 굴라시. 한국 요리와 많이 닮았다는 굴라시는 소고기, 고추, 양파, 파프리카를 듬뿍 넣은 국물요리로 빵과 밥 모두 잘 어울리는 체코의 대표음식이라고 한다. 그녀를 생각하며 국물 한 스푼 음미해 봐야지. 어둑해져 가는 거리에서 노란 가스등에 하나씩 불을 켜는 모습은 사라지고 없겠지만 굴라시는 맛보고 올 수 있겠다.
책을 좋아하는 막내와 나는 도서관 구경도 계획에 넣어야겠다. 프라하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손꼽히는 클레멘니눔 도서관이 있다니 그곳도 꼭 들러볼 것이다. 비록 책을 읽어 볼 수는 없겠지만 도서관의 모습도 눈에 담아와야겠다.
프라하의 야경만으로 성이 안 찬다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도 들러서 한번 더 야경에 취해보자.
돌아오는 길에 막내는 해리포터 헝가리어판을 살 것이고, 나는 보내주었지만 잊지는 못할 전혜린 님을 추억할 작은 인형 하나쯤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와야겠다.
삶은 나와 공간이 만드는 직조이다. 그 미지의 공간 속으로 나를 인도하고 오롯이 나를 만나는 여행, 일상을 잠시 로그아웃할 때 비로소 삶의 무게가 한껏 가벼워진다. 그 마음은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힘이 되어 줄 것임을 믿는다. 막내의 새로운 시작이 여행의 설렘까지는 아니겠지만 조금쯤 설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