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손님이 와서 사 간 물건이 상했다고 손해배상 하라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따 또 온다고 사장님 나와 있으래요."
"그래? 알겠어."
사장 체면이 있지. 그런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대답했다....만 머릿속은 이미 복잡했다. 반품, 환불도 아닌 손해배상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별일을 넘어 골치 아픈 일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올해의 최고 이슈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큰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가는 내내 '침착하자, 침착하자.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주문을 백번도 넘게 외웠다.
직원에게 들은 내용은 이러했다. 손님이 지난주에 우리 가게에서 마른오징어를 샀단다. 그날 밤에 배탈이 나 고생을 해서 원인을 찾기 위해 그날 먹었던 음식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오징어 한쪽에 곰팡이가 피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병원 진료를 하고 약 처방을 받을 만큼 이틀을 고생했으니 그간 받은 피해를 보상해 달라는 손님의 요구였다. 손님이 가져온 마른오징어 겉 포장을 보니 유통기한은 아직 몇 달이나 남은 정상 날짜였다. 한데 실제로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곰팡이 핀 부분이 겉 포장지에 가려 있어 우리도 손님도 놓쳐 이런 탈이 났다.
내가 단독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었다. 바로 거래처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협조를 구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두세 번 있었는데 그때는 손님이 뜯자마자 발견해서 바로 환불 처리를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손님은 먹고 탈이 났다고 하네요. 가져온 물건 제가 확인했고요."
유통기한이 남았는데도 곰팡이가 핀 이유는 건조과정에서 습도 조절에 문제가 있었다는 설명과 함께 손님이 다시 온다면 본인들이 통화를 하겠다니 깔끔한 일 처리가 감사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알리기 위해 손님이 어서 다시 오기를 기다릴 정도였다.
나의 바람대로 손님은 곧 매장에 들렀다. 중년의 부부로 화가 난 마음이 아직 진정이 안 된 상태였다.
"사장님이세요?"
앞뒤 따지고 잴 것 없이 바로 90도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직원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많이 고생하셨다고요? 죄송합니다."
"내가 이걸 먹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병원을 다녀오고 약을 먹고 내가 죽다 살아났어요. 마트에서 이렇게 곰팡이 핀 것을 팔아도 되는 거예요? 네?"
"당연히 안 됩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아직 남아 있었고 겉 포장지에 가려져 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손해배상 해줄 거예요?"
"제가 손해 배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조사에 전화해 보니 직접 통화하겠다고 연락처를 줬습니다. 이 번호로 연락하셔서 얘기해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아니! 판매는 여기서 하고 책임은 왜 안 지는데? 내가 여기서 사서 탈이 났으니까 여기서 해결해야지!"
손님은 점점 격양되고 있었다. 예의 바른 태도로 영 불만족스러운 말만 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못마땅할지라도 나도 어쩔 수 없다.
"저는 지금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확인이 필요하다니 병원 진단서와 약 처방서도 가지고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그건 여기서 할 일이고 나한테 먼저 손해를 배상해요!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나한테 배상한 만큼 받으면 되잖아요. 어쨌든 당신들이 여기서 팔았잖아? 그럼, 책임을 지라고!"
"단순한 교환이나 환불이라면 바로 처리해 드리겠지만 손해배상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건 제조사 잘못이니 제조사가 책임지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저희가 끼어봤자 말을 전하는 역할뿐이니 시간만 더 소요될 수 있습니다. 손님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가 연락도 다 해놓은 상태이니 직접 전화하셔서 설명하시면 금방 해결될 것같습니다."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으면 정몽주가 단심가로 답했듯이 우리는 서로 다른 의미의 노래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설득 중이었다. 자신이 겪은 고초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와 내 의무 외의,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불편한 심리가 팽팽히 맞섰다. 한쪽은 흥분된 목소리로 흐름을 주도하려 했고 다른 한쪽은 최대한 몸을 낮춰 흐름에 맞서고 있었다. 일촉즉발,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누군가는 전환해야 했다.
"손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겠어요? 직접 전화드리라고 거래처와 통화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쉬고 계시면 곧 연락이 가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로써 우리의 돌림노래가 끝났다. 달리 다른 방법도 없고 자신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결과를 얻게 된 손님은 들어올 때보다 화가 누그러져 돌아갔다. 다행이다. 위의 손님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 진상은 아니다. 다만, 문제 해결 포인트를 서로가 다르게 생각한 것뿐이다.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기에 최대한 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예의와 절차를 무시하면 손님은 없던 오기까지 생기고 문제는 더 커진다. 그리고 손님 입장에서 화날 만한 일 아닌가? 입장바꿔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 어쨌든 오징어를 말린 오징어 회사가 책임지기로 하고 일은 정리되었다.
담배를 사는 손님들은 자기 취향대로 피던 담배를 사는 게 대부분이다. 익숙한 맛에 적응되어서일 테다. 그중 예민한 감각으로 같은 담배의 맛을 미세하게 구별해 내는 손님들이 있다.
"사장님. 이번에 들어 온 담배가 상한 거 아니에요?"
"유통기한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담배도 상할까요?"
"맛이 예전과 좀 달라요. 변질된 것 같은데요."
"제가 담배를 안 피워서 잘 모르겠네요. 담배 포장지 옆에 고객센터 번호 있어요. 거기로 전화해서 문의해 보시겠어요?"
손님은 직접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이유가 궁금한 나도 따로 문의하였다. 열악한 환경(습도 높은 곳, 자외선 내리쬐는 곳 등)이 아닌 이상 맛의 변화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담배 맛은 담배회사에 문의하고 곰팡이 핀 오징어는 오징어 회사에 따져야 하며, 손잡이 뜯긴 쓰레기봉투는 구청에 항의해야겠지만 조금 미안했던 손님도 있다. 11시가 넘은 늦은 밤, 술을 자주 사 가는 손님이 들어왔다. 소주 두 병을 가져와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10L 쓰레기봉투도 달라고 했다. 술 냄새가 풍겼다. 카드 계산을 하는 사이 쓰레기봉투에 소주 두 병을 담고 손님에게 계산이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카드를 돌려받은 손님은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 "퍽" 소리가 들렸다. 손님의 손에 들려있어야 할 쓰레기봉투가 카운터 앞에 떨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는 소주 한 병이 깨져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깨진 병과 함께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괜찮으세요?"
짜증보다는 매뉴얼이 먼저다. 습관화된 서비스 언어가 튀어나왔다.
"쓰레기봉투 손잡이가 찢어진 거네요? 그래서 이걸 놓쳤고 소주 한 병이 깨졌으니 어떻게 해요?"
술에 취해 손에서 놓친 줄 알았는데 봉투 손잡이 하나가 뜯어진 불량이었나보다. 불량이 있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소주병이 깨지고 어떻게 배상할 건지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라 고민에 빠졌고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의 표정도 굳어졌다.
"사장님이 배상하셔야죠. 소줏값 당연히 줘야죠. 그리고 표정이 왜 그래요?"
이런 상황에서 표정 관리까지 해야 했다는 손님의 뉘앙스에 어안이 벙벙했다.
"손님. 저희가 어떻게 쓰레기봉투 한 장 한 장 확인하고 팔겠어요? 손님도 물건 들 때 조금 더 조심했으면 좋았을걸요. 봉투 가지고 구청에 가서 항의하세요."
점주는 항상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아무리 서비스직이라지만 술병을 깬 손님 앞에서 표정까지 검열받아야 하는 건가? 순간 발동한 오기에 아무말 대잔치가 열렸다.
"그러니까 깨진 소주는 배상 못 하신다는 거예요?"
"네."
"사장님! 일 처리가 너무 아쉽네요."
(전 손님의 말투가 참 아쉽네요) 웬만해서는 손님의 클레임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편이지만 시종일관 따지는 말투가 맘에 안 들었다. 감정이 상한 손님은 그대로 나가버렸고 깨진 병을 치우는 나도 빈정이 상할대로 상했다. 아침부터 일진이 안 좋더니 기어이 짜증 나는 일로 하루를 마감한다며 투덜댔다.
욱하는 마음에 큰소리는 쳤지만, 장사꾼은 장사꾼인지라 손님 한 명을 잃었다는 아쉬움에 곧 침울해졌다. 쓰레기봉투 한 장으로 구청 갈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자주 오는 손님에게 기어이 오기를 부렸을까? 소주 한 병 그냥 줬더라면 기분 좋게 끝났을 일을. 한데 나의 우려와 달리 그 손님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오더니 지금은 단골이 되어 있다. 손님을 마주할 때마다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애써 모른척하는 일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둘 다 까칠했던 그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명랑한 말투로 예의를 차린다. 손님도 나처럼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먼저 찾아온 당신 속이 나보다 넓소.
결론은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교환 환불 외는 제품 포장지에 적혀있는 고객센터로 연락하시는 게 가장 빠른 처리 방법입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