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준비해 두었던 선물 세트가 하나, 둘 팔린다. 주머니 사정 탓에 고민하다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지만 꼭 성의를 표시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따져 맘에 드는 걸 고른다. 손님이 고른 샤인머스켓을 빨간 보자기로 포장한다. 최대한 고급스러워 보이기 위해 손끝에 정성을 다하여 리본을 묶었다. 리본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조심히 들고 나가는 손님의 발걸음이 기분 좋은 듯 가벼워 보인다. 이 순간만큼은 명절 기분을 느낀다. 분위기 따라 살랑이는 마음이 조금 전 나간 손님 걸음 따라 양가 부모님에게 향했다. 어머님의 전매특허 된장찌개 한 숟가락 얹은 무생채 비빔밥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어 넘길 때면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비록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아니지만 어머님 손맛에 길들여져 오랜만에 맛보는 반찬과 찌개류는 시끌벅적한 명절보다, 기름진 명절 음식보다 더 반가운 고향이었다. 입맛을 다시다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매년 설, 추석이면 겪는 일이다.
현실이라 함은 명절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 나도 남들처럼 시댁, 친정을 오가는 평범한 명절을 보냈다. 음식 준비를 돕고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부리고 사랑을 받는 통상적인 설, 추석이었다. 때론 귀찮기도 했지만 삼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화목했다.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가족의 덕목이었다. 모든 자영업이 그렇듯 가게를 하고부터 평범한 명절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알바도 한 가정의 아내이자 딸이자 며느리다. 명절 즐겁게 보내라고 손에 자그마한 선물 세트 하나 들려 보내 쉬게 했다. 알바가 가족들과 함께하는 동안의 가게 일은 내 몫이다. 손주들 그리워하는 시부모님 마음 모른척할 수 없어 남편과 아이들마저 먼 시댁으로 보내고 혼자 가게를 지켜야 했다. 하루 16시간 영업으로 이삼일을 버티다 보면 체력과 정신이 좀먹는 느낌이랄까. 아이들과 남편이 없는 조용한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기쁨은 찰나로 자고 나오기 바쁘다. 나만 힘든 건 아니다. 남편도 편할 리 없다. 왕복 열 시간 운전과 본가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돌아오자마자 피곤해하는 나와 교대로 바로 가게를 지켜야 했으니, 체력이 바닥을 쳤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명절을 생각하면 벌써 지친다.
이번 추석은 특히나 길다. 여행, 부모님 댁 방문 등 모두가 연휴 계획을 잡는 이때, 남편과 나는 어떻게 교대로 가게를 볼 것인지 근무 계획을 짠다. (이번 추석엔 시댁에 안 간다.) 지금은 어차피 선물을 손에 쥐어 줄 알바도 없으니 연휴 휴식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6일이나 되는 긴 연휴 덕에 거래처들의 휴가도 길어졌다. 남 쉬는 게 배 아픈 것이나 하겠지만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다(나만의 생각일지라도). 다음 주 초까지 쉬게 되면서 2주 분량을 발주해야 한다. 2주 분량도 문제는 안 된다. 정확히는 2주 분량을 선불로 내야 하는 담배와 쓰레기 봉툿값에 자금적 부담을 느끼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 마트는 거래처마다 결제 방식이 조금 다르다. 일배(매일 배달하는 신선 제품으로 우유, 두부, 콩나물)는 본래 현장 결제이고 주말이 지난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대부분 정상영업을 하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매주 발주하는 음료 또한 2주 치를 주문해야 하지만 어차피 월말 결제라 큰 부담은 없다.
문제는 담배와 쓰레기봉투다.
두 품목은 선불제로 발주 금액을 입금하지 않으면 물량 발송을 하지 않는다. 예전엔 다른 거래처와 같이 후불제였다(쓰레기봉투는 줄곧 선불). 2주 치를 발주하게 되면 총금액을 2주로 나누어 반반씩 결제하는 아량도 베풀었다. 하지만 폐업하는 마트들이 늘어나면서 미수금을 갚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나 몰라라 하면서 모두 선불제로 바뀌었다(적어도 우리 동네는). 결제 방식만 바뀐 게 아니다. 영업사원이 1주일에 한 번씩 와서 재고 수량을 파악하고 발주를 하던 시스템에서 담배사 앱을 통해 점주가 발주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동네에 따라 예전 방식대로 영업 사원이 찾아다니며 발주하는 곳도 있다)
그렇다고 담배가 돈이 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걸 삼척동자도알 것이다. 담배 마진율은 9%대다. KT&G를 예로 들면 판매가 4,500원짜리 담배의 매입가는 4,070원이다. kt&g, 던힐, 말보로, 마일드세븐이 9%대 마진으로 대동소이하다. 말보로 테리아의 경우는 더 박하다. 판매가는 4,800원이지만 9%대의 마진을 깨고 8% 중반대로 내려섰다. 담배 4사, 2주 치 분량이면 몇백만 원을 훌쩍 넘어간다. 쓰레기봉투도 마찬가지다. 9%대의 마진으로 현금선불이다. 예전에는 7%대였으나 2019년 마진율을 9%대로 해당 구청에서 조정해 주었다. (판매가는 광주시 모두 동일하나 매입가는 구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마진율이 10%도 안 되는 품목들의 2주 치 선불 시스템은 분명 부담이 된다. 다른 거래처 월말 결제에 스텝이 꼬인다고 할까? 가뜩이나 불경기로 어려운 처지라 더 그렇다. 점점 장사하기 힘든 환경이 되는 것 같아 아슬아슬한 기분이다. 다행히 쓰레기봉투는 앱 주문 외에 광주은행에 입금하고 구청에 가서 받아 올 수 있기에 이번은 최소한만 주문하기로 했다.
담배뿐 아니라 주류 물류센터 또한 슬슬 선불제 움직임이 보인다. 몇 달 전 선입금하라는 담당자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아니 사실은 인정에 호소했다.
"우리가 단 한 번도 결제를 미룬 적이 없는데 왜 우리에게까지 이런 잣대를 들이미시나요? 평소 깔끔하지 못한 거래처를 상대로 해야죠. 우리는 기존대로 후불제로 합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밀리게 되면 그때 선불제를 하든 거래를 끊든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다행히 여태껏 결제가 깨끗했기에 선불 리스트에서는 제외되었다. 장사는 돈이 곧 신용이고 신뢰다. 내가 인정에 호소했다지만 그들은 나의 말발이 아닌 지난 몇 년간의 결제내역에 의지해 우리를 판단하고 정의한다. 평소 깔끔한 돈 관계를 해야 하는 이유다. 어제는 술 도매업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만큼은 결제를 빨리 해달라고. 명절을 앞두고 목돈이 들어가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두말없이 바로 입금했다. 하는 김에월말 결제인 모든 업체를 남편과 앉아 숫자놀이 해가며 입금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물론 통장도 시원하게 비었다. 때론 억울하다.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결제하는데도불량마트와 똑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 담배사는 전체 매출액도 중요하지만, 거래 신용에 따라 차등을 두고 융통성을발휘해 보는 건어떨지 싶다. 우리도 명절이면 목돈이 들어간단 말이다. 명절이 싫은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