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메모장을 담긴 마음
"오늘 비 온다는데 진행하실 건가요?"
현기는 오는 같은 날은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손사장은 가랑비가 조금 내리다 오후에는 그칠 거라고 했다. 정말이지 비가 그치든 말든 비가 오는 날은 이일을 하고 싶지 않다. 눅눅한 날이면 시취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왠지 고인의 유령이라도 떠도는 것처럼 선뜻한 한기가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작업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역시 오늘은 망조가 들은 날인 것 같다. 추적이는 비에 엘리베이터 없는 5층. 현기는 발걸음이 무거워 계단만 쳐다보고 고인의 집으로 올라갔다. 역시 비 오는 날의 그 냄새는 찐득하게 몸속으로 스며든 걸 느낀다.
56세 여성분의 집이었다. 아주머니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했다. 집안에는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냉장고 안도 싱크대 선반도 모두 텅 비어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고인은 돌아가실 때까지 음식을 거부하신 것 같았다. 무슨 사연을 가지고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먹지 않는다는 것은 몸이던 마음이던 심하게 아프다는 증거라는 것을 현기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고인은 등산을 하고 많은 지인들에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사진을 남겼다. 그중에 누가 고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 사진 속 사람들 중에서 웃고 있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인은 목을 맸다고 했다. 그 자리 밑에 동근 체액 자국이 보였다.
집안은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나리가 난 상태였다. 서랍장은 반쯤 닫다 만 것과 완전히 빼서 뒤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옷장 안의 옷들은 한꺼번에 옷걸이에서 잡아당긴 것인지 튕겨져 나간 옷걸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유족들이 왔다 갔다는 증거다. 바닥에는 운동화자국과 하이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유족들이 와서 유품들은 다 챙겨 갔을 것이다. 하지만 왜 저 환하게 웃고 있는 액자와 앨범을 두고 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집안의 물건 들어 이렇게 헤집으면서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 까? 확실한 것은 고인이 사랑하고 믿었을 그 사람들은 고인과의 추억 따윈 관심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현기가 이일을 하면서 가장 싫은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으면서 유독 유품의 행방에만 혈안이 된 유족들을 만나는 것이다. 아직은 성숙하다고 할 수 없는 나이의 현기도 이럴 때는 산다는 것이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진다. 때론 고인은 어떤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고독한 인생은 감내하고 있덨던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현기는 그동안 고인들이 남겼던 일기난 메모들을 통해서 아무 잘못 없이 단지 매정한 가족을 가진 것이 죄였다면 죄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현기는 두꺼운 겨울 코트를 정리하다 작은 스프링 수첩하나를 발견했다.
-2010년 *월 *일 남편이 이혼서류를 제출했다. - 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 못생긴 *. 그러니까 버림받지.-
-남편의 새 여자, 예쁘다. 날씬하다. -
- 뚱뚱해도 계속 먹어대는 내가 싫어. -
- 살이 빠졌는데도 예쁘지 않네. -
낙서처럼 보이는 고인이 메모는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내용만이 가득했다. 아마 고인은 자의로 이혼을 선택 한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분명 남편 외에도 가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아무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않은 것인지? 현기는 늘 이런 궁금증이 가슴을 옥죄는 것 같아 괴로웠다. 현기도 안다. 손사장이 늘 말했듯이 나는 청소부일 뿐이다. 이들의 인생과는 전혀 무관한 유품정리사 일 뿐. 늘 염두에 두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고인들의 일기장이나 메모를 읽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자신을 어쩔 수 없다. 현기는 이것 역시 아직 초짜이기 때문에 부리는 오지랖으로 치부했다. 시간이 지나면 일기장을 수거하고 보관하는 일을 무덤덤하게 수행해 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현기는 지금 마음이 아프다. 자신을 책망하며 떠난 중년여인의 일생이 너무 가련했다. 그녀는 분명 대우받지 못하는 취급을 당하며 이혼을 했다는 것, 자신의 자식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죽어서도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현기가 유품 안에 수첩을 던져 넣자, 벨소리가 났다. 집주인아주머니였다.
" 냄새! 벽지도 다 뜯어내고 싱크대도 다 바꿔야겠네. 아니 전 남편 마누라라는 여자가 와서 죄다 뒤지고 폐물이랑 통장을 챙겨 같으면, 이거 다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집주인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코를 막은 채 동의를 구하려는 듯이 물었다.
"보증금 남은 거 있으면 그걸로 해결하시면 되고요. 없으시면 연락을 한 번 해보세요."
손사장은 눈도 안 마주치고 중얼거렸다. 현기는 집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슬퍼졌다. 고인의 터전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 들어와 능멸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손사장은 이런 현기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 이 일 오래 하려면 감정이입시키지 말아라. 가족도 정부도 어쩌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가 슬퍼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정신 단단히 붙들어 매. 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늘 생각하고 생각해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