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커리어 도전기 시작과 함께
대학을 졸업하고 일 년을 쉬면서 뭐를 하며 살지 고민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생이란 정말 어떻게 살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의 연속이다. 물론 답도 없다. 우리 모두 한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 자신도 알면서 삶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일상의 무료함에 힘든 직장 생활에 우리를 던진 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표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스펙에 한줄 정도로 생각 할지 모르나 나는 대학 진학에 대해 불만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미술대학을 갔고 듣고 싶은 철학 강의 미학 강의만 찾아서 들었다. 물론 학우들과 술 먹고 노는 그런 재미는 없었지만 나름 정말 성실하게 4년을 보냈다.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미대는 먹고살기 힘들고 직장도 박봉이었다. 1년을 쉬면서 유학에 대한 헛바람만 든 체 시간은 꾸역꾸역 흘러 돈을 벌어야만 하는 시기까지 왔다. 그래도 대충 이력서를 쓰고 소기업에 취직했다. 사회인으로 한발 내밀었지만 역시 힘들었고 1년 뒤에 그만뒀다. 내가 생각했던 일도 재미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또 3 개월을 쉬면서 뭘 하지 고민을 했다. 전공과 관련 있는 디자이너 포지션으로 액세서리 무역을 하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4년을 일하면서 외국 유학이 아닌 이민으로 생각을 바꿨다. 다양한 국적의 클라이언트들을 만나고 영어 회화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토익 점수가 아닌 실전 영어를 준비하고 돈을 모았다. 무역 회사에서의 경험은 영어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꾸게 되었다.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도 없앨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학창 시절 영문법에 머리를 쥐어 띁으며 싫어했던 영어를 돈 내고 매일같이 학원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직장인 국비 지원받으며 영어회화반을 다니고 결국 원어민 수업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나름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뭔가 열심히 살아가다 우연히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1년을 같이 놀다가 2013년 4월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5월 이민을 결심하고 8월에 퇴사를 한다. 이야기가 뭔가 극적이지만 실제상황은 더 강렬했던 것 같다. 당연히 남편을 놀랐고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결정을 했다. 아이엘츠 스터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12월에 비행기를 탔다.
생전 처음 와보는 캐나다는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으며 여기저기 외국인 천지였다. 토론토 어학원을 등록하고 남미, 일본인 그리고 대만인 학생들과 수업을 들었다. 정말 재미있는 수업들이 하루를 즐겁게 했고 저녁에는 클럽도 가고 친구 집에 가서 놀기도 했다. 뭔가 유부녀가 혼자서 잘 노는 느낌이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것들이 서툴렀던 거 같다. 캐나다에 왔으니 당연히 빨리 늘 줄 알았던 영어는 그다지 느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고 가끔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토론토와 작별하고 몬트리올로 와서 컬리지에 다니기 시작했다. 취직이 쉽고 빠를 것 같아 컴퓨터 네트위킹을 공부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 같기도 하고 바보 같은 결정인 것 같기도 하다. 2015년 졸업 후 2개월 뒤 친구의 도움으로 VFX/ANIM CG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몬트리올에서 거의 처음 사귄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 랜더팜을 관리하는 부서에 팀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친구가 다녀서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그 회사에서 2년 반을 일하고 팀 리드가 된다. 그 2년 동안 한국인처럼 일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는데 더 잘하고 싶어서 자진해서 더 늦게 까지 일하고 내 능력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리눅스 공부도 하며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또 시간을 흘러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된다.
어느새 연봉은 거의 두배를 올랐고 나는 내가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쁘게 일을 하던 중에 나와 남편은 영주권자가 되었고 그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하며 아는 척하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같은 회사 아티스트들을 항상 부러워하며..
나의 컴퓨터 네트워킹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깊지 않으며 관심도 별로 없으니 그다지 성장도 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꾸벅꾸벅 졸기 일 수였다. 2D를 배워보려고 Nuke 트레이닝도 하러 다니고 나름 노력은 했다. 하지만 변명이라면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퇴근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늘 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에 대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잘 못하면 잘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근데 나는 퍼머넌트 포지션으로 팀 슈퍼바이져였다. 도대체 왜 그런 얼토당토 한 생각을 했을까?
아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 느끼는 상태적 박탈감 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의 떡은 왜 이래 항상 커 보이는지 아티스트들을 볼 때마다 배가 아프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되고 싶었으면 했다.
또 그렇게 시간은 흘러 다른 팀에 더 좋은 자리가 났고 그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젠 서버 관리와 미디어 정보 관리를 해야 했다. 당연히 아는 게 없으니 매일 회사 지식인 사이트에 가서 글을 읽어보고 구글링을 해서 어찌어찌 일을 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아시는 분은 제발 쪽지라고 보내주세요.
그렇게 정신없이 온갖 스트레스를 받던 2020년에 코로나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나는 딴짓이라는 것을 매일 같이 조금 더 오랜 시간 하기 시작했다. 하라는 서버 모니터링을 안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지만 이별도 했다. 2021년은 시작부터 나에게 너무 가혹했고 열심히 하루 쉬지 않고 달리던 나의 시계는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무려 5년을 했다. 그 와중에 또 승진도 해서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었다.
정신병원을 나오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상쾌한 바람이 스치는 순간에도 그리고 그저 좋은 날씨에도 나는 행복하겠다고.. 슬픔은 내가 뜻한 대로 오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기쁠 수 있는 시간 동안은 많이 최대한 기뻐하지고
그렇게 영원히 20대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지만 나는 30대가 되었고 중반을 향하니 더 조급해졌다. 나름 회사에서 자리도 잡아야 했고 번듯한 차와 집도 있어야 했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 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뭐가 잘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 체 그냥저냥 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은 나를 성장시켰나 보다. 드디어 원하는 CG 아티스트의 길을 가보려고 학교를 찾기 시작했다. 학비가 엄청나게 비쌌지만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에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마음을 먹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민을 준비할 때처럼 희망으로 가득 찼다. 나이 36살에 3번째 커리어를 위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인생은 100세까지인데 아직 젊디 젊은 꼬꼬마이지 않은가. 머리도 자꾸 써야 늙지 않는 법이니 이런저런 말로 위로하지만 엄청 불안하다. 잘할 수 있을까? 직업은 구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남편도 나를 응원하고 나도 나를 응원하니 앞으로 나아가야지.
가다가 힘들면 좀 쉬면 되고 뭐 심각할 필요는 없다. 행복해지려고 더 편하게 살려고 캐나다에 부푼 희망을 안고 왔는데 장소만 바뀌었지 하던 행동은 하도 바뀌지 않은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뒷마당에 나와서 별 대단치도 않은 글을 쓰며 나름 행복하다. 6월의 시원한 여름 바람과 뜨거운 햇살 그리고 음악이 나를 풍족하게 해 준다. 방금 먹은 밥을 뒤로하고 마시는 시원한 미숫가루도 꿀맛이다. 아 인생은 역시 살만해.
제3의 커리어를 도전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았다. 즐겁게 행복하게 공부하고 또 도전할 것이다. 어떤 미래가 올 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여기서의 포인트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