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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어스름으로 물든 풍경

by 한 율
사진: 한 율


푸른 어스름 속에서 마주한 풍경


해가 저물고 난 뒤 검은 어둠이 깔리기 전의 시간. 혹은 해가 뜨기 전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 어스름. 녁에서 밤이 되기 전, 새벽에서 아침이 되기 전의 중간 단계. 애매하게 걸터앉은 것만 같은 인상을 주는 시간대.


푸른 어스름이 깔린 시간대를 좋아한다. 어둠이 깔리기 전이나 해가 뜨기 전의 하늘빛이 가진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이 음에 들기 때문이다. 특히 새벽 어스름이 감도는 시간 안에 있으면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특히 그 시간대에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우리가 보던 사물들은 평소와는 다른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선글라스를 쓰고 사물을 바라볼 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평소와는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한 율


쟁반같이 둥근 보름달


보름달이 뜬 어느 날 저녁 무렵. 빈티지 디카로 찍은 달사진. '쟁반같이 둥근달이 어디 어디 떴나' 고개를 돌려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저녁 하늘에 존재감을 뽐내는 은빛 만월.


노을이 걷히며 점차 땅거미가 내려앉는 저녁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보름달의 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둥근달에 초점을 잡고 줌을 당겨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보름달. 손떨림 방지모드를 사용해도 고배율로 줌을 당기면 사진이 흐릿하게 찍히는 경우가 많다.


흐릿하게 찍은 달사진을 여러 컷 지운 뒤,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보름달 사진. 오래된 디카로 찍은 사진치곤 달의 모습이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 달의 표면에 생긴 분화구들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다.


사진: 한 율


시린 겨울날, 나목을 올려다보며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어느 겨울날, 시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바삐 걸음을 움직다. 해가 떨어지기 전 빠르게 하산을 하고, 이동하던 도중에 발견한 나목 한 그루.


푸른 어스름이 깔린 겨울날 초저녁.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빈 가지에는 세찬 바람만이 걸려 윙윙 바람 소리를 내었다. 온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풍경.


사진: 한 율


겨울나무의 인상

추운 날씨에 걸음을 재촉해 지나쳐버린 나무. 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떠올랐던 나무의 모습.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갔다. 나무 밑동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나목 한 그루를 사진으로 담았다. 사진을 찍을 때 겨울바람이 수차례 훑고 지나가자, 주변의 한기가 일순간에 몰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을씨년스럽고 황량해 보이는 나무.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지만으로 충만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분명 따뜻한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는 다가올 계절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지금까지도 사진 속의 겨울나무를 보다 보면 여러 가지 인상이 한꺼번에 몰려오곤 한다.

사진: 한 율


무표정한 회색 전봇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전기. 그렇기에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전봇대. 콘크리트 회색 전봇대로 흔히 보이는 익숙한 사물이다. 전기가 흐르는 전봇대와 전깃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전형적인 이미지의 풍경.


'무표정하고 딱딱한 느낌의 전봇대' 도회지의 건물숲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회색 도시의 인상과도 같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이러한. 인공적인 구조물보다는 자연의 풍경을 담곤 한다.


하지만 푸른 어스름이 깔린 하늘 풍경 아래 서있는 전봇대를 보자, 문득 이를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뻗어나가는 전깃줄과 회색빛 기둥.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자아낸 차가운 인상이 찌릿하게 뇌리를 스쳐 지나친다.



사진: 한 율

푸른 어스름 꽃을 피우는 수양벚꽃


푸른 어스름이 깔린 시간, 꽃을 피우는 수양벚나무. 수양버들처럼 아래로 축 늘어진 가지에서 피어난 수양벚꽃. 환한 낮에 피어있는 벚꽃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경. 수앙벚꽃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수수한 멋을 가지고 있다.


직 잎이 나지 않은 가느다란 가지에 빼곡하게 맺힌 꽃망울과 벚꽃들. 약하게 살랑이는 봄바람에도 가지가 위아래로 한침동안 흔들렸다. 흔들리는 수양벚꽃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침이 오기 전, 맞이한 이른 봄날의 풍경.


푸른 어스름 속에서 펼쳐진 풍경들을 한데 모아 글로 엮어보았다. 비슷한 시간대이지만, 각각의 사진이 지닌 인상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앞으로 마주할 푸른 어스름은 어떠한 인상을 남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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