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을 최선으로 이끈 명분, 나의 명분은 무엇인가?
'글을 쓰고, 그리고 일상에서 친절하십시오.'
'여러분 삶의 명분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의 말씀과 함께, 나의 글이 그러니까 자기치유의 글쓰기 수강생들의 글이 달라짐을 느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두 번째의 글을 보내고 마치 인생 전체의 변화를 칭찬받은 듯 뿌듯함과 함께 왜소해 짐을 느낍니다. 사실 그렇게 나의 글이 변화되고, 그리고 달라지기를 소망하고 있었어요. 나를 가두는 고정관념, 자기 검열들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사람들에게 읽을 만한 거슬림 없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명분을 대의명분과 소의명분으로 구분하시고, '사사로울 사'자를 사사로움과 명분으로 설명해 주시고, 아트만을 소문자 아트만 욕심과 대문자 아트만 우주적인 합일이라고 알려주시는 데 이 부분을 사실 어떻게 '앎'으로 '깨달음'으로 연결할지, 톡 깨 놓고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마틴 스콜세이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혹은 이것을 패러디한 것인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문장도 멋진 말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저도 크게 감명받은 문장이기도 한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이 문장도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에머슨의 시 중 '가장 내적인 것이, 적절한 시기에 가장 외면적인 것이 됩니다.' 라든가 '자신의 생각을 믿고 사랑하십시오'라는 표현들이 감명으로 맴돌지만 아직 저는 저를 지극히 신뢰하지 못하고 나를 신뢰하는 순수한 어린아이로 가는 길에 '내 안의 걸림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시 속 아름다운 표현이고 나와는 거리를 두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문득 어느 한순간이 떠오르는데, 제가 늘 경이로운 순간이라던가 경이로운 배움의 순간 떠올리는 인생의 한 순간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오빠와 함께 고향에 내려갔고 늘 보던 고향 산을 함께 올랐습니다. 오랜만에 오른 산행, 의지하던 오빠와의 산행이라 나는 한껏 자만에 빠진 것 같아요. 소백산 어느 줄기를 걸으며 광활한 산맥을 발밑에 두고 나는 벅차올랐고 계속 걷고 싶었습니다. 오빠에게 곧 조금만 더 가자고 졸랐고,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소백산 자락의 부석사가 나온다며 큰소리쳤습니다. 오빠도 믿을 것 없는 산 꼭대기에서 나를 믿고 싶었는지 큰소리치는 나를 믿어 주었고, 우리는 조금이 2박 3일이 될 수 있는 산 위에서의 무모한 걸음을 이어갔어요.
갑자기 소백산 능선에 검은 구름이 순식간에 몰려오고 산꼭대기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운무가 드리웠고 비가 내렸습니다. 낮도 밤으로 만드는 날씨의 변덕이 그 순간에 모두 일어났고 갑자기 겁이 덜컥 난 남매였어요. 앞으로 더 갈 수도 없었지만, 뒤로 가는 길도 잃어버린 우리는 밤이 내려오는 어둑어둑한 길목에서 이제 어느 곳으로 던 지 하산해야겠다는(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건방지고 자만에 넘치던 나는 길을 잃은 그 순간, 우주를 깨달았어요. 우주공간에 던져진 우주인처럼 나는 아버지의 아들도 어느 대학교의 학생도, 서울에 상경한 소녀도 아닌 그저 광활한 우주 속에 '나'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고 그 어느 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진 두려움도 아니었고 그냥 '깨달음'이었어요. '우주 속의 티끌 중 하나인 나'를 느꼈을 뿐입니다. 광활한 우주를 느꼈을 뿐입니다.
죽기 살기로 불어나는 계곡물 옆 사라져 가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고 다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산에서 졸졸 흘러내려가던 작은 계곡 옆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이 보일 것만 같았고 다행히도 밤이 된 얼마 후 진짜 한 집 두 집 보이기 시작했어요. '살았구나'싶었습니다.
오늘 교수님께 너무 장황한 이야기를 들려 드린 것 같아 송구해요. 게다가 주제와도 많이 벗어난 철없던 두 남매의 길잃은 이야기를 들려 드려 버렸어요. 그 순간이 늘 내 인생의 '불빛'이 되어 주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제 교수님이 읽어주신 메리올리버의 시에도 '빛'이 있었던 거 같아요.
저의 글도 길을 잃어버리네요. 막다른 골목입니다. 교수님의 질문 '내 삶의 소의명분은 무엇인가?'에 답을 잃어버렸습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답을 잃어버린 지금 나의 신세와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그때가 같아서 그날이 또 떠오른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잃어버린 소의명분은 무엇일까요? 내가 그 명분을 위해 노동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일은 무엇일까요? 게으름을 이기고, 모르는 척 외면하는 나를 이기고 나아가야 할 바는 어디일까요?
다윗은 순식간에 자신의 명분을 찾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교수님 말씀처럼 40일 동안의 고민할 시간이 주어졌기에 그럴 수도 있고요. 그가 늘 명분을 위해 헌신해 온 연습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의 자리에서 늘 다윗은 명분을 발견했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늘 명상했고 늘 수련했던 practice 했던 사람 같아요. (저는 성서를 잘 모릅니다.) 그 결과 어느 순간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과 이스라엘의 신을 모욕 준 순간을 포착하고, 하나님의 군인을 모욕한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언행'을 포착해 낸 것 같아요.
한편으로 왜 나는 늘 소의명분을 잠재의식적으로 억누르며 살게 되었는가 그것이 궁금합니다. 어릴 적 분명 저는 그러한 소의명분을 늘 가슴에 품고 다윗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수련하고 연습하고 열정을 다해 살았던 거 같아요. 어쩌면 놀았던 것도 같습니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온 (적응한) 시간만큼, 나는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나를 억누르는 법을 배워 온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적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고, 그래야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소의명분을 이 사회에 겁 없이 던지기에는 너무 거칠었고, 유치하고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했고 시샘도 가득했었습니다.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될 뿐이었겠죠. 그렇더라도 내면의 힘을 길러왔다면 좋았을 걸 싶어요. 말과 행동이 아니라 글과 진심을 키워 왔었으면 좋았을걸 아쉬움이 남습니다.
언젠가 다윗이 상상도 못 한 순간에 그가 수련해 온 조약돌 던지기 기술을 발휘한 것처럼, 저도 제가 상상도 못 한 순간에 (내내 침묵하고 내내 숨죽이던) 인생의 한 순간에 꺼낼 최고의 조약돌을 품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내내 나를 보지 않고 타인을 보고, 거대해 보이는 AI 메타유니버스 시대. 교수님 말씀처럼 구글과 애플과 삼성과 아마존만 바라본 것 같아요. 세상에는 늘 왜 바라볼 것이 어마어마한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늘 왜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지 유치하고 부끄러운지 모르겠어요.
소백산 꼭때기 그곳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의지할 곳이 없던 그때에 오직 광활한 우주와 나 밖에 없었어요. 우주와 내가 동격이랄까 그렇게 승격이 되어 버렸어요. 우주와 나 사이에 AI도 없고 부도 없고 명예도 없었어요. 람보르기니도 없고 워너비도 없었어요. 그때 언제나 내 옆에 존재했던 우주를 아주 확실하게 느낀 것 같아요.
그것이 나의 소의명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도 사실 그때를 떠올리는 나를 발견하고 강의의 주제에 벗어나 길을 잃었어요. 교수님의 다정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질문'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하고 아까운 순간이었어요. 명분을 찾아가는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교수님께 잘 보이려고 '생명존중운동'이 나의 소의명분이라 할 수도 없어요.
나의 소의명분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묻습니다.
늘 질문해 주시는 교수님!!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요.
이유가 정말 많습니다. 아이 때문이기도 하고, 남편 때문이기도 하고, 일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억지로 중단하려고 노력해야 겨우 떠오를 뿐 이 세상에 휩쓸려 살아갈 이유는 찾지 않아도 저절로 나를 압도합니다.
퇴근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글을 쓰고 퇴근하고 싶어 학교에 남아 있어요.
'당신은 자신의 삶을 위한 명분名分이 있습니까?'
글쓰기 특강 교수님의 질문에 번개보다 빠르게 글을 써서 내어 버리고, 개운한 것이 아니라 내내 찜찜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전광석화처럼 대답해 버리고, 주말의 시험공부를 하려고 서둘렀는데 아닙니다. 이미 강의 3강 줌 수업은 종료되었고, 교수님의 과제를 이메일로 제출해 버리고 개운해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제출해 버릴'일이 아니라 내 인생에 해답을 찾아야 할 일이었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나는 타이핑 몇 글자를 네이버 메일을 열어 전송버튼을 눌렀지만, 별 의미가 없던 거였습니다.
교수님은 교수님에게 제출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 인생의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답하라는 뜻이었어요. 아무리 전송완료를 눌렀다고 해도, 나는 내 삶에 던진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을 위한 명분名分이 과연 나는 있나?'
반드시 해야 할 이유 있나? 무엇을 반드시 해야만 하지? 끊임없이 나는 나에게 질문합니다. 전소완료 버튼을 누른 후 이 질문은 더 집요하게 나에게 딱 붙어 있어요. 어쩌면 왜 사느냐는 질문처럼 어렵기만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 있나? 그 사명은 진실로 사명이 맞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명분名分이 있나?
#워라벨
#스트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