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오륙도~고리핵발전소 54km
남도순례길 10 중 2022년 7번 국도 혹은 해파랑길에 관한 글과 그 이후 2023년 초에 써두었던 글이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간단히 하고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신 것까지는 좋았다.
8시에 맞춰 짐을 챙겨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방에 모자를 두고 온 걸 알아차렸다. 두 층 아래에서 내렸다 다시 올라가서 방에 가서 모자를 챙겨 내려오는데, 조식 시간에 걸린 만원 엘리베이터는 18층부터 층마다 섰다. 때문에 공용주차장에 10분 늦었더니 주차비 천 원을 더 내라고 했다.
“아유~ 너무하시네요.”
“뭐가 너무해요? 아침부터 그러지 말고 빨리 내고 가세요. 경우가 그렇지 않아요? ”
나야말로 아침부터 참 여러 생각을 했다. 그동안 얼마나 경우를 따지던 나였던가. 그런데 주차비 때문에 예약한 호텔엔 주차가 안 되고, 주차비 내고 주차한 바로 옆 주차장에선 아침부터 경우 없는 사람이 되었다. 천 원에 왔다 갔다 하는 ‘경우’. 그런 도시의 경우, 전기요금과 목숨이 걸린 위험의 경중을 가늠하지 못한다. 실은 전기요금의 할인율 축소는 탈핵 때문이 아니라 가스나 석탄발전소 때문인 것도 잘 모른 채.
만약 고리 핵발전소나 월성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반경 30km에 있는 국내 최대 산업도시인 부산과 울산과 경주는 ‘부울경 메가시티(Mega City)’는커녕 메가디재스터(Mega Disaster 재난)로 무사하지 못하다.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산업 자체가 마비될 것이다. 영화 <판도라>를 기억해 보라.
그런 거대도시 부산에서 하단역부터 부산역까지 걸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날 녹나무가 오륙도부터 해파랑길을 걸으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또 그렇게 걸었다. 현지인 말을 듣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출차해서 광안리로 갔다.
두 번째 지인 찬스.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같은 입주작가였던 소설가의 집에 주차하기 위해서였다. 퇴소하시면서 “부산에 오면 하루 재워줄게요.”라고 하신 인사말 그대로 연락한 거였다.
“언제 한번 밥 먹어요.”가 ‘정말 밥 먹을 약속을 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기회 닿으면 한번 보자’는 한국식 인사라고 한국어 수업 시간에는 외국인에게 가르치지만, 한국어 교사 출신인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는 편이다. 만약 주차문제만 아니었어도 신세 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도시의 교통·주차난은 정말 심각하다. 그렇게 지인 아파트 단지 내에 주차하고 걸어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오륙도로 갔다.
오륙도는 해파랑길 1~50코스의 출발지점이다.
친절한 안내원의 안내를 받고 지도를 보니, 2020년부터 18~50구간을 7번 국도 탈핵도보순례로 걸었다.
안전여행을 위한 가이드라인 하나가 ‘안전을 고려하여 두 사람 이상 함께 갑니다’였고, 둘이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합니다’였다.
하나는 못 지키지만 둘은 지킬 수 있었다. 사흘 치 3코스를 이틀에 걸어야 고리 핵발전소까지 걸을 수 있었지만,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이름 붙은 길이나 안내 표시도 없는 하동부터 진해까지 걸어오지 않았나. 해파랑길은 북쪽으로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갈맷길 2-2구간 이기대해안산책로이자 해파랑길 1코스의 경관 좋은 동해안을 걷기 시작하자, 부산역전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어디 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함께 걷는 트래킹족들도 매너가 좋았다. 어느 분이 곁길을 알려주셔서 더 흥미롭게 걸을 수 있었다. 해안 바위 위에 배낭을 놓고 옆에 앉았더니 배낭이 내 친구 같았다.
광안리를 지나 해운대에서 잠시 카페에 들어갔다.
카메라와 휴대전화기 충전이 필요했고, 모처럼 돈 내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사고 싶었다. 온종일 바닷바람 맡으며 걸은 나는 일부러 실내에 앉았다. 옆 테이블에 어여쁜 모녀 두 쌍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토털 코디네이션이 완벽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 주민인 그들을 보며, 저렇게 귀엽고 소중한 저들의 아이를 위해 소비문화의 한복판 같은 해운대에서 지구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핵발전소 방사능 위험은 의식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가 모티브가 된 2009년 영화 <해운대>가 기억나는 그곳에서 고리 핵발전소까지는 최단 거리 25.2km였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쓰나미에 의한 것이었고, 2016년 9월 경주에서는 5.8, 2017년 11월에는 포항에서 5.4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핵발전소의 부실공사와 안전성 위험은 차치하고라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그 어떤 건물도 건재할 수 없다.
미포에 가자 내게 곁길을 알려주신 분이 “앗, 혼자 걸어가던 분이다.”라며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셨다. 나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분들은 혼성으로 어디 술집을 찾아가시는 듯했다. 산행이나 트래킹 후에는 역시 술인가? 나는 그런 단체 술자리보다는 얼른 씻고 한적한 곳에서 두셋이 담소를 나누는 게 훨씬 좋다.
미포는 1코스의 종착지다. 나는 2코스의 송정까지 걸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날 고리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km 넘게 걸었지만, 미포부터 송정까지는 레일바이크 아래 나무 갑판길을 따라 4.8km를 가면 된다. 정말 쾌적한 길이다.
송정해수욕장에서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있었다. 송정 폐역을 지나 지름 31cm인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해물칼국수를 다 먹고 어두워져서 광안리행 버스를 탔다.
혼자 있는 마지막 시간일 듯해서 탈핵 벗들 넷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마 혼자 걸어도 늘 함께였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소설가의 집에서 새벽 6시 반에 나왔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본사 앞까지 가야 했다. 김진숙 복직투쟁 릴레이 단식 중이었다.
그날 61일 차 참가자로 등록한 나는 아침 출근 피케팅을 함께하고 도보순례를 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 출근 버스들이 줄지어 정차하고 그 버스에서 직원들이 줄이어 들어왔다.
시위하는 분의 건강하고 밝은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1981년 10월 1일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전 한진중공업)에 용접공으로 입사한 김진숙이 1986년 2월 18일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된 이틀 후, 노동조합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제2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선전물 150여 부를 동료 노동자와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5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모두 3차례 부산직할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고초 당한 것도 억울한데,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을 이유로” 7월 14일에 해고당한 지 37년이었다.
김진숙 해고 당시 대한조선공사였던 회사는 1989년 한진중공업으로, 2021년 동부건설 컨소시엄으로 인수되어 HJ중공업이 되었다.
그 사이 2003년 10월 17일에는 김주익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같은 달 30일에는 곽재규 조합원이 자결했다.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한진중공업에서의 노조민주화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부당해고 인정 통지서를 발급받았다.
2011년 309일간의 고공농성과 희망버스 운동을 통해 한진중공업 해고자 전원 복직이 결정되었다. 김진숙만 빼고.
2020년 9월 25일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해고자 김진숙에 대한 복직 재권고가 있었고, 2020년 12월, 희망버스와 2020년 부산~서울 희망뚜벅이 도보행진이 있었다.
암 투병 중인 김진숙은 2020년 12월에 정년도 지났다.
1년 전 엄동설한에 청와대 앞에서 다섯 명이 최장 48일까지 단식하며 소원했던 그의 복직.
그때 노숙하던 단식자들 앞에 밤새 경찰 차량을 공회전시켰던 정부, 그리고 인권변호사 시절엔 김진숙 복직을 지지했던 대통령이 촛불 혁명으로 탄핵된 전 대통령을 임기 내 사면하는 시절에 왜 국가폭력으로 해고당한 김진숙 복직은 37년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까?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뀐 회사 앞에서 출근 선전전 하는 이의 밝고 건강한 아침 인사는 고가도로 아래 맞은편 건물에 걸린 김진숙 걸개그림 얼굴에 닿고 있었다. 매일매일 일상이라 아무 감각이 없는 것일까? 죽겠다 죽겠다 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인의 앓는 소리처럼 해고노동자의 복직시켜 달라는 외침은 공장의 매연이나 소음처럼 자연스러운 소리인가? 대체 왜 아무도 들은 척하지 않는가?
8시 반쯤 동해선 월내역에 주차하고 송정역으로 기차를 타고 왔다.
9시쯤 송정역에서 걷기 시작해서 오시리아역을 거쳐 해동용궁사에서부터 해파랑길을 걸었다.
9km쯤 걸은 11시쯤, 대변항에서 월성 핵발전소 이주대책위와 함께 상여시위를 하고 온 울산의 은정과 영상이 합류했다. 내 배낭을 영상이 대신 메었다.
내가 그날 김진숙 복직 투쟁을 위한 릴레이 1인 단식이라고 하자, 둘도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울산에서 월성에 8시까지 가느라 아침밥도 못 먹었을 텐데, 내가 먹으라고 해도 둘은 마다했다.
내 배낭은 평소에도 크기에 비해 무거운 편인데 기장군청에서 쉴 때 들어보니 돌덩이 같았다. 안을 보니 텀블러가 내 것 말고도 세 개나 더 들어 있었다. 영상이 두 누님의 짐을 혼자 짊어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리 건장해도 무거웠을 배낭을 멘 영상은 이미 꽤 걸어온 내가 지칠까 봐 선두에 서다 뒤로 가서 보폭을 유지해 주었다. 언제나 씩씩한 은정은 얇은 운동화를 신고도 잘 걸었다.
오후 1시쯤 저 멀리 고리 핵발전소가 보였다. 그런데 그 지점부터 해변에 카페와 캠핑촌이 즐비했다. 대체 핵발전소가 관람 거리라도 된단 말인가. 방사능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걸 보면서 차를 마시고 캠핑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일광해변 지나 임랑해변으로 가기 전, 마을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 할아버지 한 분이 소리를 치셨다.
“아니 전기 안 쓰고 살아?”
그 뒤에 두세 명이 뭔가 거들려고 들썩이셨다. 그런데 내 뒤에 있던 은정이 맞받아쳐 더 크게 소리를 쳤다.
“방사능이랑 핵폐기물은 어쩔 건데요?”
그 뒤에 영상까지 걸어오는 걸 보자, 마을 분들이 더는 소리치지 않으셨다. 맨 앞에 왜소한 나를 보고 만만해서 큰소리쳤는데 그 뒤로 듬직한 둘이 함께 오자 그만하신 거였다. 사람 심리란 그렇게 본능적으로 우열을 감지한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그래서 성경에 독처하지 말라고 나와 있나 보다. 아니 성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전여행을 위한 가이드라인 첫 번째가 ‘안전을 고려하여 두 사람 이상 함께 갑니다’였으니까. 은정과 영상, 둘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2시 40분. 임랑해변이었다.
2017년 늦여름과 가을, 혼자 무턱대고 찾아와 사진을 찍어 그해 포토청 단체사진전 <흰>에 전시했던 <원전백지화>. 그때의 흰 파도와 모래는 그대로였고 발전소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신고리 5.6호기는 공론화로 인해 건설이 확정되어, 2021년 10월 기준 종합공정률 72.12%였다.
나는 회상과 만감에 한참이나 바다 앞에 서 있었다. 사진을 배우고 처음으로 몰두해서 무언가를 찍었던 그 기억이 생생했다.
‘임랑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자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자유로움이 마음을 채웠다. 어휘를 선택하느라 긴장할 필요 없이 뷰파인더에 집중했다. 구도를 선택하고 초점과 조리개값을 맞추다가 문득 내가 혼자서도 외로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찍고 있는 내 사진이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2018년 1월 탈핵이야기 1 중)
하지만 5년이 지났고, 그렇게 걸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은정과 영상은 하루 동안 아침엔 월성, 오후엔 고리 핵발전소를 보았다. 둘은 지척에 핵발전소가 두 군데나 있다는 현실을 통탄했다.
3시 20분, 고리 핵발전소의 4개 돔이 다 보이는 마지막 지점까지 걸었다.
27km. 마지막 날 최장 거리였다.
영상이 내 배낭을 메주지 않았다면 완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약사인 영상의 오후 출근 시간이 이미 지났다. 월내역 세워둔 내 차로 대변항까지 갔고, 거기서 주차한 차로 울산까지 가야 했다. 후다닥 떠나는 영상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
2019년 6월부터 2022년 1월까지 7번 국도를 걸었다.
지도상 7번 국도는 부산 옛시청교차로부터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474.5km이다.
하지만 2년 반 동안 내가 걸은 7번 국도는 벌써 500km가 넘었다.
아직 남은 구간은 경주 나아리부터 포항 칠포해수욕장까지 80~110(호미곶 경유) km이다.
닷새에서 엿새 정도 걸을 거리이다.
그 길에 언제 누구와 갈지 아직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지금 이곳에 흔적을 남겨 놓아야, 그때 이어서 쓸 수 있기에 자리를 남겨둔다.
물론 그때까지 이곳에 글을 쓸지 쓰지 않을지 모른다.
지금 왜 여기에 지난 기록을 옮겨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비 여행자에게 도움이 될만한 교통편이나 맛집이나 숙소 정보가 딱히 없기에 편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물며 이 소비시대의 불특정 다수에게 탈핵의 기치를 억지로 펼 생각도 없다.
나는 활동가가 아닌 작가이므로.
'마르쿠제가 니체와 알베르 카뮈에 동조하는 어조로 언급하는 것처럼, "예술은 삶에 헌신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경향을 인정하게 되었다. 예술가는 실천가가 되었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사가 되었다."'(<예술로서의 삶>, p. 176) 는 주장도 인정하지만, 진정 순전한 삶의 저항과 성취로써의 운동은 자신을 변화시키기도 버겁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미디어 발자국을 남긴다고 해야 할까.
종이책을 내고 싶지만 아무도 흥미 있어하지 않는 소재를 가진 작가의 마지막 발판 인터넷.
책과 영화는 끊임없이 꿈을 펼쳐준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화면이 암전 되면 꼼짝없이 현실로 돌아온다.
내가 밟고 걸으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본 그 길을 어찌 이 평평한 화면에 다 옮겨놓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잠시나마 다시 행복해질 수 있기에 쓴다.
수년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기에 혼자 한 약속들을 지켜냈다.
그런 중에도 걷고 싶은 길이 떠오르고, 그 길의 거리를 재고, 어딘가에서 쉬어갈까 경로를 정할 때면 나는 설레었다.
심장이 건강하게 박동하고, 피가 신선하게 돌고,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고, 각막이 깨끗이 씻겨지는 그 체험을 책상 앞에 앉아서는 할 수 없다.
나는 또 걸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쓰고 있는 이 글은 또 다른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여정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기에
그렇게라도 해야 내일 눈을 뜨고 싶을 것 같기에
그래서 나는 자꾸만 다음 도보순례길을 정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로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 글을 읽고 누군가는
이 사람도 나처럼 여린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부는구나(보통 슬픔이라고 한다) 그러나 씩씩하게 살고 있구나 그러니 나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