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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순례길 5 프롤로그
나아리와 울산 북콘서트

2024년 1월 경주 나아리와 울산 북콘서트

by 일곱째별


살아 돌아왔다.

영하 10도의 혹한을 뚫고 경주 문무대왕릉 봉길해수욕장부터 칠포항까지 7번 국도 혹은 해파랑길을 완주했다.

이제 2024년 1월 21일부터 27일까지의 여정을 차근차근 써 내려가려고 한다.



프롤로그

2023년 11월 30일 새벽 고요한 잠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긴급재난문자였다. 평소 휴대전화기를 무음으로 해 놓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벽 4:55 긴급재난문자였다.


[기상청] 경북 경주시 동남동쪽 19km 지역 규모 4.3(이후 4.0으로 발표) 지진발생/낙하물 주의, 국민재난안전포털 행동요령에 따라 대응, 여진주의.


지도를 보았다. 경주 나아리 인근이었다. 지진이면 핵발전소는?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탈핵 벗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벗 한 명이 황분희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부위원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대피 준비를 하신다고 했다. 여진 걱정으로 날 밝을 때까지 다시 잘 수 없었다.

강의 후 낮에 부위원장님과 직접 통화하니 그냥 댁에 머물러 계신다고 했다. 종강하면 곧 내려가겠다고 했다.


12월이 지나고 다음 해 1월이 되었다. 울산 북콘서트 일정이 잡혔고, 내려간 김에 곧바로 경주~포항 구간을 이어 7번 국도 도보순례를 완주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한파가 몰아닥치는 시기였다.



2024년 1월 21일 일요일

마지막 배추로 끓인 된장국을 다 먹고 집안을 싹 걸레질하고 반듯하게 정리한 후 집을 나섰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 첫 장면처럼. 언제 다시 돌아올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내 자취를 깨끗하게 남기는 것. 외출할 때 항상 하는 습관이다.


동네 좌석버스를 놓치고 자동차까지 돌아가는 동안에도 배낭이 무척 무거웠다. 운전해서 대전역 근처에 주차했다. 하차하기 직전에 주황색 우비, 검은색 누비바지, 비니 beanie 모자와 색깔 맞춘 주황색 캐시미어 목도리, 회색 캡 모자를 조수석에 놓고 내렸다.

2020년 2월 첫 7번 국도 도보순례를 나설 때와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려고 같은 옷에 같은 모자를 쓰려고 했지만 무게 때문에 모자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더 따뜻한 모자를 선택했다.


대전역까지 1.5km를 걸었다. 흉골 스트랩과 힙 벨트를 조였는데도 배낭이 꽤 무거웠다. 대전의 자랑 성심당에서 나아리에 드릴 선물로 튀소 3종세트와 순수롤케이크를 샀더니 두 봉투에 따로 담아주었다. 스틱을 잡을 손이 없어 스틱을 매달았더니 배낭은 더 무거워졌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두유와 삶은 고구마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수첩 비닐을 벗겼다. 작년 말 서울 교보문고에서 산 MOLESKINE 몰스킨 클래식. 나를 위해 이 수첩을 다시 사기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비움실천한다고 한동안 저가 위주로 살았다. 나를 찾는 시작이 예전에 사용하던 몰스킨 수첩을 다시 쓰는 것이었다. 몰스킨에 어울리는 펜으로 선택해 가져온 건 초록색 F SCOTTFITZGERALD 스콧피츠제랄드 1896-1940 지우개 달린 연필. 끝부분에는 내 이름이 쓰여있다. 예전에 엄마가 해 주시던 방식으로, 나무 끝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그가 내 이름을 써준.


13:05→14:05 대전에서 경주까지는 기차로 한 시간. KTX를 오랜만에 탔더니 쾌속이 무언지 새삼 느꼈다. 그런데 기차에서 이번 도보순례를 위해 새로 마련한 1인용 코튼라이너를 깜빡 잊고 왔음을 알아차렸다. 전날 밤 11시까지 다큐멘터리 대본을 작성해서 송고하느라 정신이 좀 없었다.

신경주역은 작년인 2023년 12월 28일부터 경주역으로 명칭 변경이 되었다. 경주역에서 50번 버스를 타고 경주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45분을 기다려 오후 3시 20분에 150번 버스를 탔다.

오후 4:20 감은사지 석탑을 지나 잠시 후 나아·원자력발전소 후문 정류장에 내렸다. 황분희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부위원장님 댁까지는 혼자 찾아갈 수 있다.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양손엔 빵 봉투를 들고 걸어갔다. 집 근처에서 얼룩 개 번개가 경계하며 다가온다.


“저 왔어요~.”


문이 열렸다. 검은 원피스의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서 계셨다. 현관에 배낭을 내려놓고 스틱을 떼어내고 엎드려 등산화 끈을 풀었다. 그사이 부위원장님은 내 배낭을 옮기려고 드시더니, “아유 무거워.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메고 다녀?”

오면서 마시지도 않아 다 식은 원두드립커피는 왜 텀블러에 타왔는지. 오후 늦게는 커피를 못 마셔 한 모금 마시고 버렸다.


부위원장님과 사 간 케이크와 만들어 놓으신 달콤한 무전을 먹었다. 안부를 여쭤보았다.

31번 우회도로가 집 앞으로 나는 바람에 토지 절반 정도가 잘려나가서 봄에는 집을 지으실 계획이라 신다. 보상은 받았지만, 부위원장님이 이사 나가면 이주대책위원회 유지가 어려우니 그냥 계신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다행이었다.

마을 소식으로는 풀빌라가 은행 대출을 제때 갚지 못해 경매에 넘어갔단다. 지난번(2022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 성업임을 확인하고 갔었는데 어찌 된 일이냐고 반문했다. 전 이장이 절반 정도 호실을 로비로 사용했단다. 게다가 아직도 현 이장에게 마을 운영권을 인수인계해 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도 막무가내란다. 한수원을 등에 업고 장기집권했던 전 이장의 세력은 마을에서 막강했다.


다섯 시 반이 넘어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배추된장국에 날배추와 멸치와 김치. 부위원장님이 최근 채식 위주로 식단을 조정하셔서 예전처럼 반찬이 가득하지 않았지만, 국만으로도 맛있게 식사했다.

식사 후 옆방을 따로 내주셔서 나는 곧 조용히 쉴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울산 북콘서트. 그다음 날부터 도보순례를 할 계획이다. 짐을 빼고 또 뺐는데 대체 배낭은 왜 무거운 걸까? 배낭 자체의 무게가 꽤 됐기 때문이다. 면 실내복으로 환복하고 그 댁에 있는 내 책을 통독했다. 술술 잘 넘어간다. 새록새록 지난 5년이 스쳐 갔다.


밤 10시 넘어 일찍 소등하고 잠을 청했다.

꿈을 꾸었다.

남녀 커플 중 한 커플의 사랑과 사고와 부상과 사망. 그리고 또 다른 폭력.

깨어보니 자정 50분. 어깨가 아파서 만져보니 부어올랐다. 물파스를 발랐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 이대로는 종주 불가다. 게다가 기온은 점점 내려가 영하 10도. 바람 소리가 두렵다. 포기하든가 짐을 부치고 간단하게 걷든가 선택해야 한다.

다행히 예비용 20l(리터) 68g 초경량백 울트라 데이백을 매달고 왔다.

입고 있는 것을 포함해 내가 소지한 물품은 다음과 같았다.


팬티 3장, 발가락양말 3켤레, 등산 양말 3켤레, 기능성 내복 하의 한 장, 평소 입는 내복 하의 한 장, 속옷 담은 광목 주머니, 양말 담는 손수건으로 만든 주머니, 옷 담는 주머니 둘, 검정 바지 한 벌, 검정 캡 내의 한 장, 검정 얇은 목폴라 한 장, 검정 아웃도어 후드티, 회색 집업 슈트, 검정 얇은 오리털 파카. 주황색 비니, 얼굴 가리는 버프 두 장, 자전거 탈 때 끼던 연분홍 얇은 장갑, 검정 천 마스크, 손수건, 소변 거즈, 약품과 얼굴에 바를 크림 샘플, 앰플 스틱, 선블록, 비비크림, 핸드크림, 콤팩트, 은수저, 손톱깎이, 빨랫줄, 수건, 비누, 칫솔, 치약, 치실, 립스틱, 립밤, 몰스킨 수첩, 올해 다이어리, 연필, 사인용 잉크 펜, 가죽 지갑, 휴대전화기, 소형 카메라, 카메라 여분 배터리, 카메라와 폰 충전기 각 하나씩, 370ml 스테인리스 텀블러, 300ml 티타늄 컵, 핫팩 한 개, 마스크팩 두 장, 일회용 마스크 3장, 간식용 헝겊필통에 믹스커피 5봉, 블랙커피 2봉, 얼그레이 티백 2, 오설록 1봉, 짜 먹는 홍삼 진액 5봉, 홍삼단 3봉, 비타민 C 10정. 홍삼사탕 3개. 약 파우치에 소화제, 마데카솔, 종합감기약, 테라플루 나이트 4봉, 바셀린, 바르는 파스, 반짇고리, 헤드랜턴, 휴대용 방석. 코팅한 기도문.


흠~ 나열하고 보니 많긴 많네.

산티아고 순례길부터 썼던 36리터 배낭에 있던 짐을 20리터 초경량 배낭으로 옮겨 쌀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새벽에 다시 잠이 들었다.



2024년 1월 22일 월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월성 핵발전소 앞에서 출근시각에 맞춘 상여시위가 있다.

7시 넘어 세수만 하고 옷을 입었다. 부위원장님이 내 식사만 차려주셨다. 배추된장국에 밥을 말아먹고 배낭을 챙겼다.


부위원장님이 배낭을 저울에 재보니 6kg. 전날 스틱까지 매달았으니 아마도 7kg은 됐을 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10kg을 메고 35일여를 걸어 다녔다. 그땐 7년 전. 석 달 전 지리산 화대종주 때도 느꼈지만 이제 내 체력은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8시 좀 넘어 집을 나섰다. 바람이 찼다. 천막 농성장에 연기가 나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와 있는 것이었다. 인기척이 반가운 월요일 아침이다.


천막농성장에는 모든 게 낡았다. 천막에는 전기도 끊어진 지 오래고 상여도 빛바랬다.


2024년 1월 22일 월요일
7년 전 2017년 8월 23일 수요일


천막 안에 마을 주민 한 분이 불을 피우고 계셨다. 이어 양남면 이재걸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김진선 총무님, 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 사무국장, 은정이 도착했다. 부위원장님과 나까지 모두 일곱 명이 8시 20분부터 9시까지 3438일 차 상여시위를 했다. 중간에 유튜브 방송하시는 한 분이 더 오셨다. 나도 노란 드럼통을 밀고 맨 끝에 가느라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3438일 차 상여시위


시위가 끝나고 전날 내가 사 온 성심당 소보로 세트와 차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마을에 또 무슨 사업장이 들어오는지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이상홍 사무국장에게 물어보셨다.


오전 9시쯤 은정의 차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오전 10시경 도착한 울산광역시청 앞에 있는 <북카페 사람>은 노무현재단 울산지역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시간이 충분했으므로 준비를 다 한 후 36리터 재색 배낭에 있는 짐을 20리터 얇은 주황색 배낭에 담아보았다. 꾹꾹 욱여넣으니 가능했다. 은정이 자신에게 맞는 배낭 무게는 몸무게의 1/10이라고 했다. 그럼 4kg대로 줄여야 한다. 메고 온 배낭 무게만도 2kg쯤 되는 듯하다.

오전 11:50 근처 <고을> 식당에서 은정이 스태프와 내게 낙지돼지볶음을 사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일곱째별의 탈핵 순례 울산 북콘서트 2024. 1. 22. 월. 오후 2시~3시.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남짓 북콘서트를 했다. 청와대 앞 시위 때 만난 박진영이 새 웹자보와 현수막을 제작해 왔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라이브 생방송이 준비되고 있었다. 유튜브로 얼굴이 나가다니 신비주의는 끝났다. 하지만 울산의 정성을 내 신조로 인해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 추운 날에 스무 명 남짓 모여주셨다. 김슬기 활동가의 사회로 은정의 인사말로 시작해 신윤철 교장 선생님의 오카리나 축주와 내 이야기와 황분희 부위원장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2017년부터 함께해 온 내 배낭


북콘서트가 끝나고 남은 간식을 좀 챙겼다. 은정이 차로 황분희부위장님과 나를 다시 나아리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먼저 우체국에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우체국에서 제일 큰 종이상자를 사서 36리터 배낭을 담았다. 분홍 다이어리와 일회용 마스크 둘과 양말 두 켤레와 코팅기도문과 헤드 랜턴과 콤팩트도 함께 택배로 부쳤다.

'먼저 집에 가 있으렴.'


근처 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첫 웹자보를 만들어주신 배성희 작가를 깜짝 방문으로 만났다. 주민투표 때 <바보 주막> 주모였던 그이는 지금 공익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데 상반기로 센터 업무가 종료한다고 했다. 현 정권은 많은 공익활동 지원예산을 끊고 있다. 여기저기서 현실로 접한다. 쑥차와 과자를 대접받고 손수건을 선물 받고는 서둘러 일어섰다.


오후 4:50. 다시 나아리.

은정은 우리를 내려주고 서둘러 울산에 회의하러 돌아갔다. 황분희 부위원장님이 곤드레밥을 지어주셨다. 아주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세수하러 간 욕실 앞 발매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I COULD WALK FOREVER IN MY GARDEN I THINK ABOUT YOU


아…… 내가 원하는 삶인데…….


저녁에 그날 한 북콘서트 유튜브 영상 링크를 몇몇 절친한 이들에게 보냈다.

답이 온 사람 중 25년지기가 오늘 너무 추웠다고 한다. 내일부터 경주~포항 구간 걷는다고 답했다.

-영하 날씨에요?

-내려온 김에

-재작년엔 제주도에서 난리, 가을에는 지리산에서 난리... 이번 겨울은 행복과 웃음, 편안함이 있는 고행의 길이 되셨음 합니다.^^

-아 그랬군요. (당장의 혹한이 걱정돼 잠시 잊었는데 그랬었다.) 고마워요~~!

-너무 추운 한파여서 – 다음 주에 가세요..

-내일 나서 보고 도저히 못 걷겠으면 철수할게요.


밤이 되자 어깨 통증이 걱정되었다. 테라플루 나이트타임 한 봉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고 잠이 들었다.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황분희 부위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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