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국도 순례길 5-Day 1. 문무대왕릉~양포항 21.2km
지금쯤 따뜻한 중앙아메리카에 가 있었겠지.
2024년 1월 23일 화요일 도보 순례 첫날
04:58 거센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도보순례를 취소하고 귀가해야 할까 고민이 시작됐다. 날씨는 영하 10도. 집에 강아지 콩이 물이 얼었을 텐데 가서 물을 줘야 하지 않을까. 명분을 찾아보았다. 지도를 보고 또 보고 걷다가 돌아갈 방법을 검색해 보았다.
6:30 다시 잠을 청했다.
7:30 일어나 출발할 준비를 했다.
하의는 스포츠 팬티, 스포츠 내복, 평소 입던 내복, 아웃도어 바지, 발가락 양말, 등산 양말. 상의는 캡 내의, 검정 얇은 폴라티, 검정 후드 아웃도어, 회색 지퍼형 슈트
얇은 배낭엔 면 상하복과 팬티 두 장, 양말 두 켤레, 각종 약품과 간단한 화장품, 수건, 빨랫줄, 텀블러, 몰스킨 수첩, 파카 주머니엔 지갑과 연필과 볼펜과 휴대폰과 카메라와 손수건.
부위원장님이 굴 미역국을 끓여주셔서 밥과 함께 먹었다.
“다음에 오면 이 집이 아니겠네요. 이 집에서 얼마나 사셨어요?“
“38년 살았지.”
나아리에 들어와서부터 사신 집을 이제 곧 떠나셔야 한다. 집 앞으로 31번 우회도로가 나면서 천 평에서 480평이 남는다고 하신다.
부군께서 들어오셨다.
“지금 영하 9도야.”
다행이다. 1도 올라갔다.
부군께선 지금 집은 동향인데 새로 지을 집은 남향으로 지으실 거라고 하셨다. 잠자코 듣고 계시던 부위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중에 조용할 때 와서 우리 둘 사진 좀 찍어줘.”
순간적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네.”
내가 부위원장님을 만났을 때는 고희.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연세 드신 분이 사진을 원할 땐 딱 한 가지 이유이다.
9:20 마지막 검정 파카를 입고 그 위에 앞에는‘이주만이 살길이다.’ 뒤에는 ‘월성원전이주대책위원회’라고 쓰인 노란 조끼를 입고, 빵빵한 주황색 얇은 배낭을 메고, 얼굴에 버프를 올리고, 주황 비니를 쓰고 그 위에 핫팩을 주머니에 넣은 검정 아웃도어 옷 후드를 쓰고 파카 후드도 쓴 채 얇은 연분홍 장갑을 끼고 파란 스틱을 집고 떠날 채비를 했다. 현관에서는 욕실 앞 발 매트가 보인다.
I COULD WALK FOREVER IN MY GARDEN I THINK ABOUT YOU
나는 내 정원에서 영원히 걸을 수 있어요 그대를 생각해요.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부위원장님이 문을 여신 채 오래 서 계셨다.
“잘 가.”
정원이 없어도 나는 영원히 걸을 것이다. 그대를 생각하면서.
나아리 정류장 안내판도 한국수력원자력(주)월성원자력본부 제공이었다.
9:29 나아리 정류장에서 150번 버스에 올랐다.
9:38 봉길터널을 지나 문무대왕릉·봉길해수욕장 정류장에 내렸다. 문무대왕릉 쪽으로 가보았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고 동해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15년 전 와보았을 때는 웅장하던 사적 158호 대왕릉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5km 아래 핵발전소가 있기 때문이다. 681년의 문무대왕은 1982년에 근처에 핵발전소가 생길 줄 아셨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시절에는 핵발전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셌다. 스틱을 잡은 얇은 장갑으로 시린 바람이 투과되었다. 접었던 파카 소매를 내려 손등을 덮었다. 검정 파카는 선목이 입다 버린 걸 아까워서 내가 입은 지 한 10년쯤 되었다. 2020년 2월 첫 개인 도보순례를 나설 때 입었던 옷이니 이번에 마지막 기념으로 입고 왔다. 언젠가 어디서 담배 불똥이 튀었는지 왼쪽 어깨 아래 조그만 구멍이 나서 오리털이 솔솔 빠지기도 한다. 이젠 그만 입어도 충분히 입은 옷이었다.
도보 시작 지점에 지도를 보며 내내 걱정했던 구간이 있었다. 이틀 전 버스 타고 나아리로 들어갈 때 바다로 이어진 하천을 건너는 다리였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기도 했지만, 그 코너 구간이 유달리 음습했다. 새벽까지도 그 구간 때문에 도보순례를 보류할까 망설였다.
아래 다섯, 위 다섯 벌 옷을 껴입고, 모자 셋을 겹쳐 쓰고, 배낭 메고 스틱을 쥔 채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기온은 낮았지만, 날은 화창했다. 도로 옆에 붙어 다리까지 왔다. 100m 앞이 지방도 929호선 분기점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발을 떼는데 놀랍게도 바람이 뒤에서 불었다.
‘됐어. 갈 수 있겠구나.’
다리 위에 접어드니 왼편 전봇대 사이로 저 멀리 감은사지 삼층석탑 둘이 보였다. 그 탑 주위를 돌던 2020년 7월이 떠올랐다. 생각은 정지해도 마음은 바람이 방향을 바꿀까 봐 몸을 바삐 움직였다. 쌩하고 다리를 벗어나 대본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밤새 겁내던 큰 고비를 넘겼다. 이제부턴 오른쪽 바닷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런데 왼쪽 찻길과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야 하지?’ 순간 망설였다. 그때 오른쪽에 빨갛고 노란 리본이 보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조개 모양이 길잡이가 되지만 해파랑길에서는 빨간 리본이 있다. 오른쪽으로 내려가 보니 커다란 新羅 東海口(신라 동해구) 기념비가 있다. 동해구는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나와 있는 신라 시대의 지명이라고 한다.
대본 3리를 지나 대본 2리에 들어섰는데 왼쪽 발가락이 따가웠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양말을 두 켤레 벗어보았다. 발가락에는 박힌 게 없어 양말 발가락 부분을 살펴보니 얇게 접힌 은박지 조각이 나왔다.
‘이 작은 조각은 발견해서 버리면 발가락이 안 아프지만, 마음의 상처는 원인을 떼어내지도 못하니 얼마나 아픈가.’
대본 1리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지나니 감포관광단지가 나왔다.
10:47 전날 부친 배낭이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빨리도 들어가네. 우체국 만세.
11시 넘어 나정항 정류장에 들어가 세찬 바람을 피했다. 비로소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쉬는데 문자가 왔다. 니키로부터 날씨가 좀 추운데 수고가 많다고. 마음으로만 함께하니 미안하다고.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 혼자 걸을 작정이었으니까. 잠시 후 엉덩이가 따뜻해졌다. 요즘 정류장엔 별 신기한 기능이 다 있구나. 어쩐지 이름도 따뜻한 나정에서 온기를 받았다.
나정고운모래해변을 지나니 전촌솔밭해변이 나왔다. 장진마을과 거마장마을을 지나니 길가에 폐가가 하나 보였다. 오래된 집을 고쳐 살고 싶다던 기억이 난다. 곧 경주감포우체국이 나왔다. 예전 같으면 우체국을 지나치지 못하고 서성댔을 터이지만 배낭에 관제엽서가 들어있는 큰 수첩은 없다. 초경량이라 허리 벨트도 가슴 벨트도 없어 온 무게를 어깨도 감당해야 하는 배낭. 그 배낭을 메고 온몸으로 매서운 추위를 맞으며 걷는 내게 엽서 따위의 여유를 찾을 시간은 없었다. 그날 내로 숙소를 찾아야 한다. 체력에 맞춰야 하므로 어디에 종착할지 아직 모르는 상태. 바삐 걸음을 옮겼다.
11:50 감포파출소에서 휴대폰으로 지도를 켰다.
12:09 감포공설시장에 다다랐다. 감포쯤에서 점심식사 할 예상으로 찾아놓은 식당이 있었다.
(아~ 울산 북 콘서트 때 질문 중 숙식과 간식에 관한 질문이 있어서 이번 순례기에는 그 부분을 자세히 쓰려고 한다.)
이천식당을 찾아갔다. 인터넷 별점을 보고 갔는데, 가보니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출연한 곳이었다.
울산에서 점심 먹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탈핵 집회를 하면 감포에서 부티 나는 분들이 와서 친 원전 편에서 방해를 한다고. 그래서 그분들과 많이 싸워야 했다고.
‘이주만이 살길이다’ 노란 조끼를 입고 식당에 들어서면서 약간 겁이 났다. 손님 중 혼자 온 사람은 나뿐.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옷을 벗고 숨을 돌린다. 만 원짜리 동태찌개백반 정식을 시켰다.
텀블러에 정수기 온수를 따르자 초록색 니트 입은 여자가 “우린 물 드세요.”라고 한다.
“뭘 우리셨는데요?”
“우엉 작두 연근이요”
우엉이랑 연근은 알겠는데 작두는 모른다. (작두콩이었나 보다) 몸에 좋은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텀블러에 이미 따른 물 때문에 망설이자, 초록색 여자는 정수기 배수구에 따라 버리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다.
“가실 때도 따라가세요.”
인심 좋은 식당이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 거울을 보았더니 양 볼이 뻘겋다. 버프를 두 겹이나 했는데도 날카로운 찬바람에 얼굴이 얼었다. 내 몰골을 보니 실상이 느껴졌다.
식탁으로 와 정식을 받았다. 여덟 가지 정갈한 반찬과 무와 두부가 들어간 칼칼한 동태찌개와 쌀밥. 잘 차려진 백반이었다. 특히 고추장에 조린 반건조 가자미는 정말 맛있었다. 남의 식탁에 안경과 휴대폰을 놓는 옆자리 사람의 무례함도 묵묵히 견딜 수 있었다. 초록색 여자는 맵시 있게 손님들을 관찰했다. 내게도 필요한 것 있으면 더 드리겠다고 했다. 찬핵 인구가 많다는 감포라 겁먹었던 나는 이천식당의 따스함에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싹싹 먹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좀 미뤄봐 혼자 하다가 쓰러진다. 우리 나이에 큰일 나’
전날 밤에 온 문자의 주인공이었다. 전화를 받았다.
“OO야”
내 본명을 부르는 이, 40년 지기였다. 걸어서 감포라고 하자 혈압은 어떠냐고 한다.
“걱정하지 마.”
“걱정된다.”
걱정해 주는 건 물론 고맙다. 하지만 나이 운운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리산 화대 종주 직전에도 그런 충고를 들었다. 내가 나이를 생각 못 하는 것 같다고. 우리 나이는 넘어지면 골절이라고. 지리산 종주 내내 그 말이 떠올랐다. 결국 지리산 종주는 대참사로 진행되었다.
나를 오래 안 사람들은 지금의 내가 걱정되는 게 당연하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여리고 약하고 아프고 슬픈지 잘 아니까. 하지만 나를 정말 생각한다면 용기를 북돋워야 한다. 현실감 있는 나였다면 빈손으로 독립하지도 엄동설한 한파주의보에 길을 걷지도 않을 테니까. 정신 차리라고 조언해 봤자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그리고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밥을 다 먹고 옷을 주섬주섬 다시 입었다. 초록색 여자가 더 필요한 거 없느냐고 한다. 필요한 거 대신 칭찬을 말했다.
“참 건강하고 씩씩한 좋은 기운을 가지셨어요.”
수초 머뭇거리던 초록은 팔을 벌려 내밀며 말했다.
“가지세요.”
그 이타심에 웃었다. 그리곤
“여기 도보순례 첫 식당인데 덕분에 앞으로 잘 될 거 같아요.”
“이 추운데요? 이 동네 추워요. 바닷바람이라.”
“네, 춥네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왜 걸으세요?"
나는 뒤돌아 배낭에 달린 몸자보를 보여주었다.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
“아아~” 여자가 반응했다.
계산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여자가 다시 당부한다.
“다치지 마세요.~”
“네, 그럼요.”
씩씩하고 건강한 초록이다.
한동안 나도 사람들에게 “조심해서 오세요(가세요)~”라고 인사했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어쩐지 조심할 일을 부르는 듯했다. 그래서 “안전하게 오세요(가세요)”라고 인사말을 바꿨다. 같은 뜻이지만 어감의 차이인데 보다 긍정적인 투로 말하는 게 낫다.
한 시 지나 감포항을 막 벗어나려는데 재색 신형 S 승합차가 내 앞을 가로막아 주차장에 선다.
‘어? 벌써? 설마 아직 아닐 텐데?’
역시 아는 이의 차는 아니었다. 도보순례를 하다 보면 공상에 빠진다. 누군가 내가 가는 길에 짜잔 하고 나타나는. 그러나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 십 년은 너무 멀어도 아직은 아닐 것이다.
오류2리와 척사 지나 오류해수욕장 야영장에서 잠시 바람을 피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일반국도 31번 표지판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는 7번 국도가 아닌 31번 국도를 걷고 있었다. 도로 오른편으로는 분명히 바다가 있는데 바다를 볼 수 없다. 풀빌라 펜션이 그득그득하기 때문이다. 풍경도 독점하는 자본에 불쾌했다.
13:50 모곡마을 지나 한참 전부터 표시가 되어 있는 무인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하고 깔끔한 카페에 사람은 없고 자동판매기에서 주문하면 2000원에 연한 아메리카노가 종이컵에 나온다. 사람 상대하기 싫은 사람은 이렇게 카페를 해도 좋겠구나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은정이었다. 이날 오후에 함께 걸으려고 했는데 전날 엄마가 입원하셨다고 했다.
처음부터 이번 도보순례는 혼자 걸을 계획이었다. 그래서 누구와도 함께 걸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은정은 내가 울산까지 왔고 멀지 않은 곳에서 걸으니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은정이 못 와도 괜찮았다. 하지만 다시금 도보순례가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어야 걸을 수 있으니.
카페 안은 훈훈한데 밖은 낮인데도 영하 3도. 25분을 푹 쉬고 다시 장비를 챙기는데 어라, 찢어진 장갑이 확 찢어져 버렸다. 가뜩이나 시린 손이 더 시리겠구먼.
14:15 다시 출발. 하도 추워 경주에서 잘지 포항에서 잘지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지도에서 봤던 펜션은 문이 닫혔다. 평일 비수기라 예약하지 않으면 영업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14:45 해맞이 고장 포항시에 들어섰다. 기분이 좋았다. 이젠 바다를 좀 볼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장기면 두원리에 들어서니 주유소 뒤편에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석유에너지와 풍력, 뭔가 혼합된 듯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호미반도해안둘레길 이정표가 나오자 곧 동백꽃 작은 봉오리를 보았다. 이 겨울이 곧 지나갈 것이다.
계원리에 설립 110주년이 되었다는 교회가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기도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몇 계단을 올라가 유리문을 잡아당겼다. 잠겨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쩌다 가봐도 잠겨있는 교회. 그럼 기도는 어디 가서 하나? 그런 교회에 등록하겠다고 하면 펄쩍 좋아하겠지.’
속으로 구시렁대며 걸었다. 푸른 바다가 겨우 보였다. 굽이굽이 내리막길을 가니 양포항이 나타났다.
15:33 양포리(良浦里) 도착. 오후에도 마을에 아늑하고 따뜻하게 볕이 잘 들어 볕 양(陽)인 줄 알았는데 어질 량(良)이었다. 세 시가 훌쩍 넘었으므로 이곳에서 잠을 자야 한다. 저녁밥도 먹어야 한다.
멀리 백숙 간판 뒤로 큰 여관건물이 보였다. 삼계탕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좀 더 가보았다. 마을 끄트머리쯤에 별점이 많은 여관이 웹 지도에 있었다. 가파른 돌산 아래 그 여관은 폐업이었다. 다시 800미터쯤 돌아가려고 돌아서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표시가 있는 굴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울산 북콘서트가 끝난 후 한 분이 다가와 말해주었다. 내 브런치 글 금방 읽었는데 최근 살이 갑자기 빠지고 있으니 욕조나 탕 목욕을 하면 좋다고.
이미 다리는 아팠지만 다시 걸어가 보았다. 그곳은 구룡포 수협 장기지점과 함께 있는 ‘어업인 복지회관’인데 목욕탕과 여관을 겸하고 있었다.
“방 있어요?”
“네.”
“얼마예요?”
“5만 원인데 방 하나 남았어요.”
현금으로 하면 좀 깎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몇 년의 도보순례로 이 정도 거래는 할 줄 안다. 깎아준 적 없다면서 깎아주기도 한다. 게다가 숙박을 하면 목욕이 공짜란다.
15:54 302호 입실.
오는 길에 몇 달 만에 전화 오면 못 받고 하면 안 받던 릴리와 통화가 되었는데 그렇게 걸을 수 있을 때 걸으라고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안내하시는 분이 이 동네는 일찍 문 닫는다고 빨리 밥 먹고 목욕하라고 해서 후딱 짐을 챙겨 나갔다.
16:10 여관에서 마주 보이는 <태원생아구> 집에 들어갔다. 깨끗해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 같았다. 탕 전문식당이라 1인분으로 시킬 게 별로 없어서 2만 원짜리 아구탕을 시켰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 호박죽이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깔끔한 일곱 가지 반찬에 탕은 양이 많았지만 거의 다 먹었다. 다음 날 아침 몫까지.
17:00 얼마 만에 공중목욕탕인지 모른다. 시골에선 집이 추우니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나 보다. 탈의실에 옷과 신발들이 진열돼 있다. 장사도 함께하나 보다. 샤워하고 예전에 알았던 상식으로 고온탕과 저온탕을 일곱 번 들락날락했다. 첫날 근육통을 이렇게 풀어주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18시. 다시 302호
창문으로 보이는 청보랏빛 하늘을 확인하고 빨랫줄에 속옷와 버프를 널었다. 밤이 되자 테라플루 나이트타임 한 봉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고 찢어진 장갑을 꿰맸다. 침대에 덮인 푸르스름한 바탕에 분홍이 섞인 이불이 어디서 많이 보던 무늬와 빛깔이다. 내 수영복이었다.
지금쯤 따뜻한 중앙아메리카에 가 있었겠지.
이 문장이 이번 도보순례 첫 문장으로 내내 생각해 두던 것이었다.
그곳에 가려고 수영복을 세 벌이나 준비해 두었다. 수영강습 때 입던 선수용 원피스 반바지 수영복, 캄보디아 호텔 수영장에서 마지막으로 입었던 민트색에 자잘한 빨간 꽃무늬가 섞인 쓰리피스 수영복, 둘 다 입은 지 십 년은 된다. 그리고 작년에 선물 받은 형광 주황색 래시가드 상의와 그에 맞춰 산 감청색 핫팬츠. 그것들을 번갈아 입으며 해변에서 수영하고 일광욕하려고 했었다.
보름간 일교차로 겹쳐 입을 여름옷들을 눈으로 챙겨두었다. 그 많은 옷을 배낭에 다 넣어갈 수 있을까. 보름 일정이 끝나면 근처 다른 나라로 넘어가 걸어볼까. 아니면 내 자전거 브랜드와 같은 이름의 호수에 가볼까. 꿈에 부풀어있었다. 그 정도는 멀리 가야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 년 동안 알뜰살뜰 부어서 곧 만기 될 적금과 다큐멘터리 제작비를 받으면 여비로 가능했다. 인연을 정리하는 데 연봉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았다. 나는 치유받고 싶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모르는 이로부터 그 단체 여행 이메일이 왔던 작년 11월 중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지경으로 절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숙고 끝에 달이 바뀌어 가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참가 합격이 되었다. 그런데 비행기 표를 알아보면서, 계약금을 보내려고 일주일, 보름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그 사이 2학기 종강과 계절학기 사이에 가려던 도보순례를 연기했다. 보름 후 연락이 왔을 때는 이미 울산 북콘서트 일정이 잡힌 상태였다. 주요한 건 타이밍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내 철칙은 앞으로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상대에게는 지키지 않기로 했다. 상대는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게 그건 무심함이고 무시였다. 적어도 내 절박함을 알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선 언젠가 또 상처를 입게 된다. 그건 경험에서 오는 직감이었다. 털 뽑힌 작은 새 같은 나를 또 다른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던질 수는 없었다.
따뜻함을 정말 좋아하고 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지금 여름인 중앙아메리카의 호화 호텔 대신 영하 9도의 대한민국 경주 문무대왕릉 봉길해수욕장부터 포항 양포항까지 21.2km를 걸어 허름한 여관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