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집 정원일기 3
숲속 작은 도서관
새집에서 첫 출근 후 퇴근길에 예술의 전당 쪽으로 갔다.
인터넷에서 본 숲속 작은 도서관을 찾아서.
길치인 나는 다 도착해서도 직원에게 전화해 그곳을 찾았다. 건물 뒤 산쪽에 있었다.
가고자 했던 생태마을 근처의 호수는 아니었지만, 숲을 바라보고 앉아있자니 이사 후 처음으로 호흡이 깊게 되었다. 나무 테이블에 아침에 싸가지고 간 토스트와 과일을 올려놓고 먹었다. 산등성이까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길에 도서관을 잠깐 열어보았다.
내 관심은 도서관이 아니라 숲속이었다.
라디오
매일이 불규칙한 내게 몇 가지 즐기는 패턴이 있다면 라디오 청취.
아침 9시면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출근길 어느 날, 같은 주파수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처음 며칠은 대리 진행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행자가 바뀐 것이었다.
오프닝 멘트 포맷도 달라졌다.
새 진행자의 어수룩함이 어서 전 진행자처럼 능숙해지길 응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예전처럼 오프닝 멘트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오전 7~9시대 라디오 프로그램이 더 반갑다. 개편 전에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별로였는데 이제는 더 즐겨 듣게 되었다. 익숙함 때문이다.
얼마 후 오후 6시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 질감이 달라진 걸 느꼈다. 클로징 멘트를 들어봤더니 작가가 바뀌었다.
수년간 오후 6시 시그널뮤직이 나오면 숨죽여 듣던 오프닝이었다. 방송에서 문학적인 깊은 사유를 듣는 기쁨이 있었다. 듣는 귀는 누구나 비슷해서, 담당 작가는 지난해 한국방송작가상 라디오 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도 진행자는 그대로지만 예전처럼 프로그램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라디오방송은 진행자의 비중이 매우 높다. 하지만 작가의 역량도 무시하지 못한다. 웬만한 글발로 라디오 원고를 쓰긴 힘들다. 인터넷이 이렇게나 발달한 지금, 청취자가 만족할만한 새로운 소재나 화제를 찾긴 어렵다.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작가의 능력뿐이다. 색다른 시선과 새로운 해석으로 매일 창작을 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에도 나는 테이프로 같은 곡을 되풀이해 듣는 것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곡들을 듣는 게 좋았다. 하지만 진행자를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연예인을 좋아해 본 적 없는 십 대 시절의 취향과도 비슷하다.
나는 진행자가 읽는 대본의 글과 그에 어울리는 곡들을 좋아한다. 가끔 사연에 울컥하는 말랑한 감성이나 문자에 자상한 답변을 해주는 진행자의 성품이 드러날 때 좋다. 가장 기분 좋은 건 선호하는 음악이 나올 때다. 그럴 땐 밋밋한 건빵 속에서 달콤한 별사탕을 발견할 때처럼 반짝 기분이 좋아진다.
출근길
출근길이 낯설던 어느 날, 분기점에서 이정표의 대구가 아닌 전주 쪽을 보고 진입했다.
진입하고 나니 틀렸음을 알았다. 처음으로 강의에 지각하게 되나 하고 당황했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니 회덕 분기점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도 다른 길이 있다.
조금 돌아가고 조금 늦어도 길은 통해 있고, 결국 목적지에 갈 순 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치유의 숲
사월 마지막 날, 이다가 왔다.
곰돌이가 그려진 화장품과 손뜨개 텀블러 케이스를 떠가지고.
이다와 콩이와 함께 치유의 숲까지 왕복 8km쯤 걸어갔다 왔다.
이다는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이 네 번째 시작됐음을 알려주었다. 새벽까지 큰 소리로 참가자들의 음악을 들었다. 한밤중에 놀랄만한 음량이었지만 인가가 드문 곳이었고 아직 창문을 활짝 열 때가 아니라 가능했다.
다음 날 이다가 돌아가며 말했다.
“5월을 이렇게 좋게 시작하니 이번 달은 좋은 일만 있겠네요.”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웠다. 내 5월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이틀 후 이다가 사 준 아이보리색 타원형 테이블이 도착했다.
드디어 바닥에 소반이 아닌 의자에 앉아 식탁을 차려 놓고 먹었다.
간소 출판기념회
담양 글을낳는집에서 만난 릴리와 시아가 새 책을 출간했다.
새 책을 받을 주소가 없을 때, 거처가 생기면 출판기념회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광양과 원주에서 온 두 시인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놓고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했다.
갓 지은 밥과 구운 고기와 된장찌개와 내가 키운 상추와 쑥갓 등과 수제맥주와 밀랍초를 테이블에 차리자, 릴리의 노란 카네이션과 시아의 화이트와인이 더해졌다.
건배 후 나는 둘의 작품을 낭송했다.
담양에서의 만남 이후 꼭 일 년. 인연이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출근하고 둘은 청소해 놓고 떠났다. 나중에 집주인은 나보다 손님이 늦게 나간 걸 의아해하셨지만, 우리는 그런 사이다. 믿을 수 있는 사이.
그날 아침 아홉 시에 급하게 출근하던 길, 플라스틱 덮개가 있는 계단에 들어와 빠져나가지 못하는 참새 한 마리가 있었다.
“얘, 그쪽 아니야. 이쪽으로 나가.”
바쁘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말해주고 갔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온 네 시까지 그 참새가 계단 안에 갇혀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출구가 뻥뚫려 있는 구조인데 이층 창까지 올라가 막힌 창을 머리로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계단을 올라가 창문과 방충망을 다 열어주었더니 다시 아래로 내려가 마지막 창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 창을 사이에 두고 참새 한 마리가 똑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아마도 안에 있는 참새의 가족이거나 친구 같았다. 몇 번을 나가봐도 참새는 맨 아래 창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 작은 뇌가 어떻게 될 듯했다.
두 시간쯤 지나 전기방충채를 들고 나갔다. 잡으려는 줄 알고 참새가 겁먹겠지만 도구를 사용해서라도 내보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계단 복도 어디에도 참새는 없었다.
오후 여섯 시였다.
그제야 나는 방충망을 닫았다. 참새가 아래 출입구로 나갔는지 창으로 나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고개를 아래로 돌리기만 하면 바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를 두고 위로만 날아오르는 속성으로 창문을 들이받던 참새에게서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았다. 혹시 나도 목표와 목적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지는 않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각도를 다르게 보면 얼마든지 자유롭고 너른 세상이 있는데 내 고집과 아집과 편견에 갇혀 한 가지만 고집하지는 않는지.......
미니벨로
하늘색 자전거 미니벨로가 생겼다.
이름이 ‘with you’(위듀)인데 하늘색이라 타면서 속으로 ‘하느리듀’라 불렀다.
매일 초저녁이 되면 하느리듀를 타고 콩이랑 동네를 돌았다.
2km 정도 돌고 와 콩이를 다시 묶어두고 연산까지 왕복 5km를 타고 오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일주일 만에 하느리듀를 보내야 했다. 내 체력에 맞는 자전거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초록색 몸체에 노란 바퀴를 장착한 내 첫 자전거 이름은 ‘뷔View나’ 혹은 ‘Peony’(작약).
둘 중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작약이 후보인 이유는 '하얀 작약(芍藥) 같은 함박웃음'과 '몹시 기뻐서 날뛰며 좋아한다'는 뜻인 작약(雀躍)의 참새 작(雀) 자가 나와 어울리기 때문이다. 몸이 가냘프고 맵시가 있다는 뜻의 작약(綽約)은 차마 나라고 하지 못하겠다.
작약의 꽃말은 나라별로 다른데 한국에서는 순결한 사랑, 수줍은 고백, 중국에서는 ‘아름다움’, 일본에서는 ‘사랑의 약속’, 프랑스에서는 ‘비밀을 지켜요.’라고 하며, 색깔별로는 흰색 작약은 행복한 결혼, 분홍색 작약은 수줍음, 빨간색 작약은 성실함이란다.
중국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을 작약꽃에 비유했고, 프랑스에서는 ‘성모의 장미’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산속의 장미’라고 부른다고 한다.
작약은 웨딩 부케로도 많이 사용된다고 하는데 얇은 겹겹이 봉오리 진 작약은 우아하면서도 풍성하다.
예전에 나는 단아하고 정갈한 도라지 꽃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것일 뿐 나이가 들면서 겹겹이 충만한 작약이 더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란이나 목단의 원숙한 농염함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수줍음이 아직 남아있고 가끔 크게 터지는 웃음이 함박꽃(작약) 같기도 하지만, 어느 정원에서 피어난 하얀 작약을 사진으로 본 순간 날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건 그때 그 정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탈핵신문읽기
정착하면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탈핵신문읽기와 녹색평론읽기.
녹색평론은 휴간 중이었고 탈핵신문은 배달이 되었다.
4월에 탈핵 벗들이 집에 왔을 때 처음으로 탈핵신문읽기를 했다.
5월에는 대전 원도심레츠에서 탈핵신문읽기를 했다. 대전과 청주와 횡성 친구들과 함께였다.
6월에는 누구와 할까 기대한다.
밍기뉴와 콩이
화장실에 난 작은 창으로 계절이 바뀐다.
앙상하던 갈색에서 연둣빛이 오르더니 이젠 제법 초록이 싱싱하다.
기차소리가 심심찮게 들리고 이젠 그 기차의 종류를 가늠할 수 있다. 시끄럽고 무거운 화물차보다 짧고 가벼운 무궁화호 소리가 들을 만하다.
새벽부터 닭의 목청이 들리고 아침부터 해가 떠있는 내내 새소리가 지지배배 짹짹 가득한 이곳.
아직은 콩이네인지 별이네인지 모를 이 집.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제제의 밍기뉴처럼 믿을만한 나무는 없지만, 여기엔 나를 좋아하는 강아지 콩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