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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천하제일의 맛

[결승전] 최종 시식 및 우승자 시상식

by 시트러스

1. 잘라낼 결심

나는 지금 초조하게 베란다 앞을 서성이고 있다.

손에는 번쩍이는 가위날을 쥔 채였다.


오늘은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

개막전도, 결승전도 혼자였다.

바질 씨앗으로 시작해, 새싹 시절.

새싹들 탈락, 모종 용병단 모집을 거쳤다.

드디어 결실의 날이 왔다.


순 지르기, 바질잎 수확, 바질 샐러드 제작 후 시식 판정.

결승전 일정이 빡빡했다.


하지만 나는 빨리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키운 저 작은 잎들을 차마 자를 엄두가 안 났다.


블로그 글과 유튜브 영상을 많이 찾아봤었다.

처음엔 '이 작고 귀여운 바질 잎을 어떻게 먹어.'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그저 '식재료1'이 된다는 글을 상기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2. 첫 수확, 성공적, 향기로움.

베란다로 나갔다. 바질이 너무 웃자라지 않도록 순 지르기부터 했다.

줄기 사이. 끝을 잘 겨눠야 할 텐데...

'싹둑' 근육질 바질 잎을 가득 단 로베르토의 잎을 잘라냈다.

순간 잘린 줄기에서 바질 향이 베란다 가득 확 풍겨왔다.


용기를 내서 자말의 줄기도 잘랐다.

샨티는 아직 작아서 조심해서 줄기를 골랐다.


"휴!" 이제 바질 잎을 자를 차례. 연약하다 생각했던 잎들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탄력이 있었다. 초보 농부의 손길도 빨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데 먹을 게 있나 안타까웠던 마음이 무색하게 접시가 금방 찼다.

접시를 들고 쌉쌀하고 향긋한 바질 향이 가득한 베란다에서 나왔다.


3. 식재료 재배치 프로젝트

이제 샐러드를 만들 차례.

준비해 둔 하얀 보코치니 치즈와 연초록 청포도, 빨간 방울토마토를 꺼냈다.

요리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굳이 말하자면 식재료 재배치에 가까웠다.

간단히 색색깔 재료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접시에 담았다.

그래도 손끝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났다.


좋아하는 접시에 토마토 바질 샐러드를 담고,

역시 아끼는 티컵 세트를 꺼내 밀크티를 만들었다.


시식 판정단이 입장했다.

결승전 첫 포크, 바질 먼저.

아삭하고 싱싱한 풀 특유의 상쾌한 향이 가득 찼다.

고소한 치즈. 심심하고 쫄깃한 식감에 이어 토마토의 상큼한 맛이 더해졌다.

재료 중 가장 맛이 강한 새콤한 청포도를 먹으니 개운한 느낌이 났다.

드레싱도 없고 단순한 원재료에 가까운 샐러드였다.

하지만 장담컨대, 갓 따온 바질잎을 이길 수 있는 재료는 얼마 없을 것이다.


4. 할매 입맛이라 불러다오

나는 이런 맛을 좋아한다. 심심하고 쌉쌀한 맛. 뭔가 구수하고 고소한 맛.

말차, 쑥같은 여러 가지 풀. 팥, 고구마, 아몬드 등등. 할매 입맛이라 놀려도 할 말이 없다.

솔직히, 할매라는 말도 좋아한다. 이상한 우연으로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이기도 한 그 단어.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우리 할매는 돌아가셨다.

시골에 가면 뵐 수 있었던 할머니는 그래서 언제나 시골의 풍경 속에 계신다.


경상도 종갓집 장손. 우리 집은 딸이 귀했다.

딸 열한 명 낳아 축구단을 만들 거라던 둘째 삼촌은 아들만 둘 낳았다.

셋째 삼촌 집에 딸이 태어나면서 나와 사촌 여동생은 딸 귀한 집의 '귀한' 딸이 되었다.


아들만 북적이는 집에서 할머니는 손녀들을 예뻐해 주셨는데, 우리만 베개가 따로 있었다.

장손을 포함한 손자들 넷은 어디서 자거나 말거나.

시장에서 사 오신 예쁜 꽃베개 두 개는 나와 동생이 아직도 추억하는 할머니의 사랑 표현법이었다.

베개에서는 언제나 시골의 풀향이 났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바질 같은 풀을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5. 별과 사탕처럼 반짝이는

밤이 되면 뿌듯하게 내가 잘 자리에 베개를 놓아두었다.

북적북적 사촌들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아도 아무도 혼나지 않았다.

어느 명절 밤. 시골집 툇마루에 나와 올려다본 밤하늘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머리 위로 광활하게 펼쳐진 어둠,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마치 반짝이는 검은 천을 풀썩- 펴서 세상 위에 덮어놓은 것만 같았다.

검은색이라고만 생각했던 밤은, 수없이 많은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에게만 슬쩍 내민 베개. 손녀딸들에게만 챙겨 주시던 약과, 반질반질한 알사탕.

그 속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처럼 내내, 별빛도 거기서 반짝이고 있었다.

할매라는 별칭이 내게 붙는 게 좋다.

반짝이는 별빛과 시골 풀향을 내내 품은 사람처럼, 그 단어를 품을 수 있어서 좋다.

할매 입맛에 딱 맞는 바질 토마토 샐러드와 밀크티를 나는 맛있게 먹었다.


6. 최종 우승자 발표

우승자가 나왔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 우승자는,

처음에 바질을 키우기로 한 그 마음이었다.


시작과 바로 예선 탈락이 점쳐졌을 때.

실제로 씨앗 선수단이 폭염 속에 모두 탈락했던 순간.


이 경기가 과연 계속 기록될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이 들었던 시간 속.

묵묵히 '그냥 해보자.' 했던 그 마음이 우승을 차지했다.


나는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비교적 명확한 사람이다.

글 읽기, 영어와 수업에 관련된 일. 약간의 손재주가 필요한 일.

이 정도가 잘하는 것의 범주에 들어간다.

애석하게도 나머지는 거의 다 못하는 것 목록에 올라간다.

운전, 운동, 뭔가 초록의 존재를 키워내는 일까지.


7. 못하는 삶의 기술

안타까운 일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간극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못하는 게 훨씬 더 많은 나의 삶을 이 정도나마

이끌어준 것은 언제나 '일단 해보는' 마음이었다.


결과가 뿌듯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흠투성이에 실패작도 많다.

그럴 땐 그러려니 한다. 나라고 다 잘할 수 있나?

그럼에도 해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뭐라도 해볼 때. 그때 모든 일이 일어난다.

씨앗도, 흙 위로 나오는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곳에 온 우주가 열렸다.


개막전에서 미정의 괄호 속에 들어갔던 상품,

바질 토마토 샐러드에서는 우승의 맛이 났다.

그 맛은 쌉쌀하고 향긋하다.


8. 폐막을 선언합니다

새싹 선수단 개똥이, 칠성이, 언년이에게 영광을 돌린다.

이제 순 지르기를 해서 다시 덩치가 겸손해진 로베르토, 자말, 샨티까지.

선수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벤치를 떠났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 폐막식을 선언한다.



[오늘의 바질 한 마디]

우승자로서 연봉 협상을 요구하는 바이다.

분무기 물 주 2회, 알비료 월 1회.

베란다 직광과 간접광 역세권 거주 보장.

똥손 코치진은 실적 보고서 제출 후 교체 검토 예정.



[바질 서포터스 대표 세 자매 한 마디]

샐러드 맛있어요.

토마토랑 바질 빼고. 치즈 빼고. 청포도만.



[명예 선수단 대표 개똥이 종합 평가]

잘 싸웠어. 내가 다 봤어.

나는 첫 번째 탈락자이지만,

가장 먼저 싸운 선수이기도 하다.


모든 '그냥 한번 해보는 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 모두의 삶에 언제나 개똥이 다음,

로베르토 같은 후보가 있음을 잊지 말길.


실패는 대개 먼저 도착한다.

하지만 성공은 할매처럼 천천히 온다.

뿌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줄기와 잎도, 천천히 초록해진다.


그리고 나는,

씨앗부터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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