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전 리허설] 전열 정비 및 후보 운영
1. 거실은 재난 현장
거실이 검은색 흙으로 뒤덮였다.
재난 현장이 따로 없다. 그 와중에 흙이 반질반질해서 괜히 좀 흐뭇했다.
"하아... 범인 진짜 가만 안 둬."
곧 범인이자 현장 감독관인 나는 주섬주섬 흙을 치우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전, 분갈이 세트가 도착했다. 주문한 지 이틀만이었다.
배보다 더 큰 배꼽답게 화분은 매우 컸다.
집 밖 화단에 나가서 흙을 부을까 하다, 거실에서 하기로 했다.
바질 용병단까지 같이 나가면 폭염에 더 시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 리스크도 감당할 수 없다.
2. 콜미 바이 더 네임, 집사
우선 거실에 종이를 최대한 깔았다.
배양토와 마사토를 준비하고, 용병단을 소중히 모셔왔다.
먼저 큰 화분에 물 빠짐을 좋게 하는 마사토를 깔았다.
마사'토'길래 흙인가 했는데, 작은 돌멩이들이었다.
나는 이제 마사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전문 식집사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마사토를 와르르 부었다. 반 이상이 화분 받침으로 다시 나왔다.
'윽.' 식집사에서 두 걸음 멀어졌다.
"깔망!"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얼른 깔고 다시 부었다.
다음은 배양토 차례. 물 빠짐이 좋고 썩지 않는 흙이라고 쓰여있었다.
'흙이 썩는 거였어? 원래 안 썩지 않나? '
식집사는커녕, 상식도 부족한 사람이 되어 조심조심 화분을 채웠다.
3. 실전 전에는 늘 계획이 있지
이제 가장 중요한 바질 모종을 파내어 옮기는 단계였다.
막대기 등으로 모종 주위를 살살 찔러서 흙덩어리째 뽑아내면 되었다.
분명, 철저히 예습한 유튜브 영상 속에선 그랬다.
로베르토를 살짝 들어 올렸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옆의 자말, 샨티도 마찬가지.
결국 동시에 들어 올리기로 했다.
모종 셋이 쑥 뽑혀 나왔다.
용병들은 뿌리를 제법 단단히 뻗어 엉켜 있었다.
뿌리를 뽑아버리거나 지나치게 흔들면 안 된다는 것은 여러 영상의 공통적인 경고 사항이었다.
4. 작전명: 머리채 분리
나는 이미 뿌리째 뽑아 셋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삐용 삐용' 익숙한 똥손의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우리 집 수경 식물들의 거친 시선마저 느껴졌다.
'여태 편했지? 이것이 바로 똥손 집사다!'
'침착하자. 머리채, 아니 줄기부터 놓고 생각하자.'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가장 크고 튼튼한 로베르토를 좀 더 힘을 주어 살살 흔들었다.
뿌리가 움직이는 듯하더니, 이내 쑥 분리되었다.
바로 흙을 채워둔 화분에 넣었다. 끼려던 비닐장갑은 아예 날아갔다.
강약 중간약, 손끝에 힘을 빼고 줄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흙을 도톰하게 덮어 주었다.
다음은 자말과 샨티. 한번 요령이 생기니 이번엔 좀 더 쉬웠다.
'아, 이래서 경력직을 뽑는구나.'
이제 종이 위는 물론, 사방이 검은흙으로 뒤덮였다.
5. 흙벼락 맞기 좋은 날
샨티를 집어 들었다. 레이디 퍼스트, 원래 화분인 독채를 주기로 했다.
아뿔싸, 샨티를 다급히 파묻고 보니 배양토가 부족했다.
모종을 심은 상태라 살살 부으려고 했지만,
5킬로짜리 흙 포대는 너무 무거웠다.
"어어!" 비틀거리다 와르르 쏟아부었다.
레이디는 갑자기 흙벼락을 맞았다.
안 썩는다더니, 잘 털리지도 않았다.
검은흙은 이제 초록 잎 위에서 반짝였다.
6. 분갈이의 기쁨과 슬픔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은 흙난리가 났다.
집안의 엄마가 되어 좋은 점은, 등짝을 때릴 엄마가 나라는 점이다.
안 좋은 점은, 치울 엄마도 바로 나라는 것.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우선 대충 정리한 뒤 베란다로 나갔다.
마무리로 모종 주위 흙을 한 번씩 더 다독여 덮고 화분 주변을 깨끗이 닦아냈다.
분갈이 처음 한 날은 직사광선은 피하고 반그늘에 2~3일 정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거실은 흙판이었다. 흙을 한데 싹싹 모아 못 쓰게 된 비닐장갑에 넣었다.
걸레를 가져와 최대한 닦아내고, 청소기를 전체적으로 돌렸다. 부직포 걸레질을 한번 더 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순식간에 원상 복구되었다.
7. 대화와 욕설 사이
살던 곳을 옮기는 것은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같이 치워줄 아빠도, 등짝을 때려줄 엄마도 없다.
얼마 전, 몰래 들은 우리 집 7살 쌍둥이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두희야, 우리 엄마 놀이할까?"
"그래. 내가 엄마!" 세희가 얼른 선수를 쳤다.
"엄마, 우리 생일 언제예요?"
"두 달 하고 또, 두 달 남았다고 했잖아. 다음 두 달 몇 월이야?"
"다음? 시벌"
"그렇지! 시벌!"
음... 욕설과 정보 그 어디쯤에 있는 저 대화를 중지시켜야 하나.
거실로 나가보려다, 다음 말소리에 멈칫했다.
"세희야, 생일에 우리 창원 가고 싶지."
"엄마도...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8.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은 날
그렇지. 나도 '엄마의 엄마'가 절로 생각나는 날이 있다.
사방이 어지러울 때, 마음에도 검은흙이 덮인 것 같은 그런 날.
"누구 닮아서 이리 어질러싼노!" 이제는 나도 엄마처럼 중얼거리며 치워본다.
깨끗해진 거실을 보니, 문득 엄마 아빠의 손길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는, 그 많던 내 삶의 흙들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함께 치워주셨을까.
딸을 분갈이 삼아 타지로 떠나보내며, 당신들도
약한 모종 하나가 무사히 뿌리내리길 속으로 수없이 기도하셨을 터였다.
9. 결승전 전열 정비 완료
분무기 물을 채워왔다.
촥촥 샨티에게 우선 물을 주었다. 다행히 흙도 살살 씻겨 내려갔다.
모종 하나당 흙이 흠뻑 젖도록 물을 주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뿐. 흙이 숨을 쉬고, 뿌리와 줄기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분갈이가 끝이 났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는 이제 결승전만을 앞두고 있다.
[오늘의 레이디 한 마디]
흙은 뿌리에,
햇빛은 줄기에.
생명은 순리를 따릅니다.
p.s 내 머리에 흙 부은 현장범 알고 있습니다.
시벌이 오기 전에 자수하십시오.
[결승전 일정 공지]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 최종화는 내일 오전 10시에 발행됩니다.
최종 시식 및 우승자 시상식에 참석해 주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2025.10.25 (토) 11. 천하제일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