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평가전] 분갈이 여부 심사
1. 사우나가 있는 풍경
나는 요즘 부자의 삶을 살고 있다. 집에 사우나실을 설치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개인 사우나. 위치는 11층 베란다이다.
문을 열면 습기 실린 열기가 밀어닥친다.
잠깐 나가는 데도 8월의 폭염에 숨이 턱, 막힌다.
'이 정도면 수행 아닌가?'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싹을 들여다보느라,
구도자의 정신까지 새겨 본다.
한낮에는 부자에서 집사도 겸직하고 있다. 집 보느라 외출도 마다한다.
바질은 햇빛을 좋아하지만 오후의 직광은 잎을 태울 수 있기 때문에,
창틀에서 잠시 반그늘로 옮겨 줘야 하기 때문이다.
2. 풀소유의 오후
법정 스님 일화가 떠오른다.
스님은 난을 키우느라 외출도 하지 않고, 비가 오면 서둘러 돌아왔다.
문득, 물건을 소유하느라 집착했던 마음을 깨닫고
지인에게 난을 선물했다는 <무소유>에 실린 내용이다.
나와 가장 큰 차이점은 내가 바질을 지인에게 선물할 경우,
거친 시비와 말이 오갈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애지중지 키운 개똥이와 언년이야. 너 가져."
"싸우자는 건가?"
그리고 또 하나, 분명히 다른 점은 나는 무소유는커녕 바질 샐러드라는 탐욕스러운 목표로 바질을 키우고 있다는 것.
요리사까지 1인 3Job을 꿈꾸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3. 칠성이와 언년이의 퇴장
그렇다. 나는 집착하고 있다.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결연한 마음으로 외출을 감행했다.
돌아와 보니, 그새 칠성이와 언년이도 허리가 꺾여 있었다.
이번에도 생장점이 죽은 상태였다.
개똥이때 많이 슬퍼해서인지 조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역시 폭염과 똥손의 콜라보는 강력했다.
기존 바질 선수들은 이렇게 전원 퇴장했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는 이제 용병단만이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퇴장한 후보 선수들은 조금 더 멀리, 높은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본다.
아주 오래전, 다른 종목에 참가했던 난 선수들과 함께다.
4. 용병단의 위기
용병단 선수들도 기세가 며칠 전 못했다. 잎끝이 시들시들 처졌다. 모종 셋을 작은 한 화분에 모아 놓으니 잎이 뻗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랴부랴 검색해 보니 분갈이 시기가 되었다.
좀 더 큰 화분과 분갈이용 배양토, 마사토 세트를 구입하였다.
각각 사천 원, 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바질 모종과 이 분갈이용 세트 비용으로 그냥 바질을 구입하는 게 낫지 않았나.
5. 슈뢰딩거의 바질
여기서, 나는 바질 샐러드 중첩 이론의 함정에 빠져 들었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샐러드는 존재이자 부존재였다.
싹이 시들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샐러드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듦이 관측되는 순간, 모든 가능성은 붕괴했고,
샐러드는 그제야 명확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도 실패의 형태로.
똥손의 슬픈 아이러니였다.
6. 니트티의 양자역학
슈뢰딩거의 슬픈 아이러니는 우리 집 곳곳에도 도사리고 있다.
옷장 문을 열기 전에는 언젠가 사둔 옷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손을 뻗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던 니트티를 꺼내드는 순간,
'이런 옷은 없으니 하나 살까' 했던 부존재의 가능성은 붕괴한다.
"여보 그런 옷 또 있어. 내가 봤어." 남편의 말이 명확해지는 바로 그때,
니트티는 다시 슈뢰딩거의 옷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참으로 신비롭다.
옷장 속 니트티만이 아니다. 유독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막상 매번 커다란 머그컵만 쓰면서 예쁜 찻잔이나 유리컵을 잔뜩 모았다.
그러고도 불 꺼진 방에 누워, 티포원 티팟 세트를 잠도 안 자고 구경했다.
7. 가짜 어른은 오늘도 야근 중
그렇게 잠들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새벽을 넘겼다.
어두운 방에서 은밀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을 흐릿한 핸드폰 화면이 비추기 일쑤였다.
일러스트가 예쁜 도자기들을 보면 수채 색연필 세트로 옮겨가는 식이다. 철없는 아이처럼 신이 난다.
'헉, 뭐야 뭐야? 3단 색연필 세트?' 집에 있는 120색은 또 망각 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른 흉내를 낸다.
세상 속 가짜 어른은 오늘도 근무 중. 은근히 잘도 한다.
한밤중엔 도자기, 새벽엔 색연필. 나의 탐욕은 항상 활발히 교대근무 중이다.
8. 조금 으른의 순간
그리고 퇴근 후엔 다시 바질을 본다.
바질이 멀쩡하게 자라려면,
벌레도 잡고 흙에 낀 곰팡이도 털고, 뿌리와 줄기를 뻗어갈 공간도 필요하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필요와 욕심 사이에서 덜어내야 할 것을 조금씩 배우는 중.
'이번엔 좀 참자. 안 쓰는 건 아름다운 가게 기부해야겠다.'
무소유까지는 못 가도 나를 덜어낼 줄 아는 순간,
'지금 좀... 으른 같았는데?'
그런 순간이야말로, 성장이라는 낯선 이름에 다가서는 중일지도 모른다.
9. 분갈이의 계절
마치 분갈이 시기를 놓친 화분처럼,
내 마음도 한동안 뿌리들이 욕심껏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계절은 늘 다시 돌아오고,
로베르토처럼 나도 다시 줄기를 뻗을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이제 곧 가을이다. 새로 자라날 무언가를 위해,
묵은 흙을 갈아엎고, 여백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다.
가을은 내게 14호 화분과 배양토의 계절.
나는 이제, 분갈이를 준비한다.
[오늘의 언년이 한 마디]
"시드는 것도 권리다.
회복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누군가의 계절은 영원히 가을로 가는 길목에 있을 수도 있다."
[대회 일정 긴급 공지]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는 이제 최종 결승전까지 2화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남은 회차는 금, 토 한 편씩 오전 10시에 발행됩니다.
2025.10.24 (금) 10. 실전! 분갈이
2025.10.25 (토) 11. 천하제일의 맛
과연 결승전에서 바질 요리가 가능할까요?
똥손 집사의 고군분투 일지는 결승전까지 이어집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