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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로베르토 vs 개똥이, 성장이라는 더블매치

[준결승 2R] 최종 진출권 대결

by 시트러스

1.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배송 중입니다."

이보다 더 가슴 뛰는 문구가 또 있을까.

"주문하신 음식 문 앞에 놓고 갑니다." 정도가 아니면 필적하기 힘들 것이다.

드디어, 용병을 들일 시간이 되었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여름 방학 목표인 바질 샐러드 만들기를 달성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우리 집 바질 개똥이, 칠성이, 언년이가 잘 자라고 있지만 한 달 뒤에도 새싹일 법한 속도다.

샐러드는 나의 의지와 새싹만으로는 만들 수가 없는 것.

나는 우회 전략을 시도하기로 했다.


신중하게 바질 모종을 검색했다. 그 과정에서,

바질 씨앗을 심었다가 모종을 사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2. 초록으로 물드는 클릭

핸드폰 화면 속에 푸르른 허브 정원이 펼쳐졌다.

레몬밤, 라벤더, 로즈메리...

또 탐욕스러운 손이 바삐 움직이다가, 스스로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이 손은 똥손이다.'


바질 모종 3개가 심긴 화분 하나가 2천 원. 배송비가 3천5백 원이었다.

저 싹을 틔우려고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생각하니 전혀 비싸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배보다 배꼽이 큰 바질 화분 하나를 주문했다.


막상 주문하고 보니, 겸연쩍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생명은 생각보다 더디 자랐고, 물을 많이 주기도 적게 주기도 힘들었다.

물방울 하나 매달면 볼록, 그나마 커 보이는 싹을 몇 번이나 살폈다. 뜨거운 베란다는 어느새 혼자만의 핫플레이스가 된 지 오래.


하지만, 대회는 대회다.

처음의 취지 '키운다, 바질. 먹는다, 바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함께 성장하며 더블 매치로 전환하기로 한다.


3. 자말, 로베르토, 그리고 샨티

이틀 뒤, 택배가 도착했다.

조심조심 상자를 열어보니, 폭염 걱정이 무색하게 튼튼한 바질 모종이 나왔다.

"바질 모종이 이렇게 큰 거였어?"

초록초록, 늠름한 자태에 아이들과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용병전으로 전환하기로 한 게 다행이었다. 나란히 놓은 두 화분 속 초록 면적은 큰 차이가 났다. 저만큼 키우려면 석 달은 더 걸렸을 것이다.


물론, 개똥이들에게 눈길이 한번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틋한 눈길을 옆으로 돌려 새로 온 모종 흙을 다독여 주었다.

바질의 원산지는 인도이고, 이탈리아 요리에 주로 들어가기에 용병단에 자말, 로베르토, 샨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4. 영어라는 빨간 약

바질 싹과 용병단을 들여다보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지만,

나 역시도 시작은 영어라는 낯선 언어 앞에서 개똥이 같은 존재였다.


'라떼' 시절엔 초등학교에 영어 과목조차 없었다.

중학교 첫 담임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셨다.

시험 후 영어 성적 우수자들에게 뭔가를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기회는 영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어가 좋았다. 바질에 몰입하듯,

영린이 영어 과몰입이 시작되었다.

새로 눈을 뜬 세상은, 영어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삼킨 순간 같았다.


5. 하늘을 보세요

계속 혼자 공부했다.

I'm fine, thank you. 는 세상 가장 멋진 격언 같았고,

This is a pen. 그게 뭐든, 나는 다 재밌었다.

교과서 속 Tom과 Jane은 이미 만의 셀렙이었다.


당시 내 등하교 메이트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였다.

"Look at the sky."라는 내 말에 친구가 고개를 휙 돌린 순간, 전율이 일었다.

'내가 말한 걸 누군가가 알아듣다니.'

그날의 하늘은, 내 단어에 반응한 세상처럼 푸르렀다.


6. 영린이와 Jane 사이

1학년 말, 마지막 기말고사에서 영어 과목 만점을 받았다.

드디어 담임선생님이 나도 부르셨다. 나눠 주신건, 영어 문제집이었다.


'아니, 문제집이 선물이라고?' 그날 나는 문제집을 가방에 넣지 않고 품에 껴안고 갔다.

한 번씩 Jane처럼 어깨를 으쓱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느린 싹이었지만 기죽지 않았다. 그냥, 각자 속도대로 가는 셈 쳤다.

빨간약의 세상은 너무 넓고 커서, 매일이 첫 로그인처럼 설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영어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기술적인 방법이야 많다. 실제로 그걸 말해주기도 한다.


7. 느린 싹의 사랑법

하지만 이 문장보다 더 좋은 설명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니,

그때 보는 것은 이미 전과 같지 않으리라."


영어뿐만이 아니다. 어떤 대상에 애정을 갖기 시작하는 시점이,

우리의 속도대로 싹을 틔우는 바로 그 순간이다.


로베르토와 칠성이는 이미 친해진 것 같다.

베란다에 나갔는데 짙푸른 바질 모종을 보면 아직도 신기하다.

저 푸른 생명력에 경외감 마저 느껴진다.


더블 매치는 이제, 시작이다.


[오늘의 용병 한 마디]

"나마스떼. 성장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신도 씨앗에서 나무를 보셨습니다."


"맘마미아, 이것은 흙먼지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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