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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장도 외주가 되나요?

[준결승전 1R] 관리권 이전 논란

by 시트러스

1. 짝다리 짚은 바린이들

바질 새싹 셋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며칠간 애지중지 물을 준다, 햇빛을 쏘인다, 오두방정을 떨었던 참이다.

그런데도 싹은 시들시들 고개를 숙였다.


'역시 똥손 엔딩인가...'

시무룩해져서 하루에 몇 번이나 안방 베란다를 들락거렸다.

처음의 작지만 꼿꼿했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바질 싹 셋 중 셋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또, 길쭉하니 줄기만 쑥 커진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셋 중 하나는 키만 커지고 떡잎이 안 떨어졌다.

멀찍이 떨어져 나온 다른 싹은 벌어진 떡잎 속 본입이 안 커졌다.


블로그 글을 찾아봐도 무성하니 쑥쑥 자란 사진만 많고,

이리 작은 싹 상태에 관한 글은 거의 없었다.


2. AI와 싸우기 1초 전

급한 마음에 사진을 찍어 AI에게 물어봤다.

진단은 '웃자람', 과한 햇빛과 과한 물 주기가 원인.

둘 다 중단하고 지켜보라는 처방이 나왔다.


AI가 이름을 묻길래 대충 '될성이' ' 부른이' '떡잎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잘해왔어요! 지금처럼 섬세하게 챙기시면,

'될성이', '잎틀이' 둘 다 다들 잘 클 기세예요!"


나는 울컥했다.

"둘 아니라고! 셋이야! 그리고 '떡잎이'거든!"

AI와 혼자 말싸움을 하며 씩씩거리고 있는데,

운명처럼 어머님께 문자가 왔다.


'잘 지내니. 쪽파 모종 좀 주문해 다오.'

어머님은 용인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새싹 세 개로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달리,

100평쯤 되는 텃밭에 온갖 작물을 키우는 부농이시다.


3. 바질계의 머슴

나는 갑자기 소작농, 아니 머슴이 된 기분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바질 모종도 검색했다.

푸릇푸릇, 초록초록 풍성한 바질 사진들이 펼쳐졌다.

나는 슬그머니 우리 집 바질 화분을 돌아보았다.

새싹들이 못 보게 앞을 막아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씨앗이 2천 원이었는데, 바질 모종 4개도 2천 원이었다.

물론 배송비가 있긴 했지만 리뷰 이벤트로 이름표까지 준다는 말에

내 눈은 오랜만에 탐욕으로 가득 차 흔들렸다.


"아직 이름이 없으니까 안 되겠네!"

간신히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귀한 자식일수록 이름을 막 짓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막 자라렴. 네 존재보다 예쁜 이름은 없어.

‘개똥이, 칠성이, 언년이로 갈까?’


바질 싹을 보며, 모종에 흔들리는 마음.

과연, 성장도 외주가 가능할까?


4. 트로트와 파닉스

2년 전 내가 있었던 학교는 학군이 아주 열악한 곳이었다.

중국에서 온 학생들은 요즘 흔하지만, 그곳은 특이하게도

몽골에서 온 어린이들이 많았다.


“새응배노!” 몽골어로 '안녕하세요'를 검색해 봤다.

다음 날, 나는 그 말을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교실에서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모도, 억양도 완벽하게 한국 어린이들과 똑같았다.

심지어 인사도 잘하고, 수업시간에 대답도 잘해서 유심히 보면

수흐, 바타르, 나른 같은 몽골 어린이.

모두 아주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었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기본 체력이 남달랐다.

선생님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저세상 텐션’이라는 말이 오갔다.

“어드야, 교실에 춤추면서 들어오지 마. 걸어서 들어와요.

어드, 앉아요. 수업 시간에 일어나서 춤추는 거 아니야.

어허, 트로트도 부르는 거 아니야."


안타까운 것은 한국 어린이, 몽골 어린이, 중국 어린이

모두 사이좋게 기초 학력이 낮았다.


작은 학교라 3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영어 수업을 맡았는데,

알파벳을 모르는 학생들이 전 학년에 골고루 있었다.


기본 파닉스와 알파벳 학습용 교재를 준다고

아이들을 유인하여 가르칠 계획을 세웠다.


5. 지원액: 0원. 시행: 재능 기부 부탁. 끝.

마침 교육청에서 기초 학력 신장을 위해 영어 보충반을 운영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예산은 없으며, 담당 교사 ‘재능 기부’를 하라고 당당히 적혀 있었다.


영어과 학교 예산이 있나 행정실장님께 문의하니, 그게 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우리 집 바질 새싹처럼 그때 나도 축 처졌다.


사실 그동안 만들어둔 자료를 출력하여 나눠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선물처럼 알록달록한 영어책을 주고 싶었다.

영어는 이렇게 알록달록 재밌는 것이라고.

우리가 영어를 배우면 기회의 문을 넓힐 수 있다고.

나는 아이들에게 새싹처럼 물을 주고 ‘꼬시고’ 싶었다.


우선 선생님들께 전체 메신저를 보냈다.

영어 보충반을 운영할 것이며, 참가비는 무료입니다.

공문 표현대로 재능 기부 형식입니다.

약간 민망해서 공문도 첨부하였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 교무 부장님께 영어과에 배정할 수 있는 예산이 없냐고 문의를 드렸다.

또다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6. 햇빛 없이도 자라는 법

물도 없고 바람도 없었다. 햇빛은커녕, 그늘도 없었다.

화분에 담긴 바질처럼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안의 햇빛을 동원하자. 일일이 출력해서 나눠주면 되지!

비장한 마음으로 A4 용지와 스테이플러를 세팅했다.

그때, ‘예산 추경해 보겠습니다.’ 부장님께 메신저가 왔다.

반짝, 햇살이 비치는 것만 같은 오후였다.


초급 20권과 중급 20권, 책을 주문했다.

최대한 밝고 예쁜 표지의 교재를 골랐다.

공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름을 적은 뒤 나눠줬다.


어드는 문워크를 하며 교실로 들어와 교재를 받아 갔다.

6학년 여학생들은 친구끼리 껄렁껄렁 어학실로 찾아 왔다.

“선생님, 좋은 냄새나요.” 그들만의 애정 표현임을 이제는 알았다.

“야아, 옷 냄새 맡지 마. 여기 사인하시고요. 다 못 풀면 교실로 찾아갈 거야.”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책을 받았다.


초급을 다 풀어오면 중급 책을 주기로 했다.

어플을 듣고 따라 읽고 쓴 다음, 선생님과 확인하면 되는 쉬운 교재였다.

결국 중급 책을 받아 간 학생은 5명도 안되었다.

하지만 나는 영어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책을 꽂아두었다.

반짝반짝, 책 예쁘지? 너희들의 의지로 이 책을 받아가렴.

할 수 있어. 선생님은 언제나 기다린다.

말없는 응원이었다.


7. 함께 자라면 더 멀리 간다

성장도 외주가 가능한가?

뿌리를 뻗고, 줄기를 올리는 건 혼자의 일이다.

하지만 꼭 혼자 모든 것을 다할 필요는 없다.

물도 바람도 없는 것 같은 순간.

같이 흙길을 내어 주고, 물을 뿌려 주는 손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마저도 아니면, 그저 옆에서 서로의 성장을 지켜볼 수도 있다.


내가 학생들에게 그랬고,

부장님이 내게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학생들은 다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나를 도와준다.


웃자란 바질 싹들에게 물은 금물이었다.

‘덥지 않을까?’

새싹들이 힘내길 바라며 잠시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 바질을 키워 보려는 계획을 맞추려면

모종을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로 이웃이 생기면 같이 힘낼 수 있지 않을까?


개똥이, 칠성이, 언년이가 더운 바람 속에

시든 잎을 살짝, 펼치는 것도 같았다.



[오늘의 바질 한 마디]

"베란다 햇빛 역세권 분양 중!

어서 오세요.

똥손 집사 손길 아래, 함께 연대합시다.


선착순 분무기 물 나눠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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