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선 1R] 고온 다습 생존전
1. 물 못 주고 왔어요!
"기사님,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아이고, 급한 일 있으신가 봐요."
"네네, 저희 집에 아이가 있는데요, 물을 못 주고 왔어요."
"물? 여름에 물 없으면 안 되지! 어서 벨트 하세요."
나는 벨트를 하고 액셀을 밟았다.
달리는 이 차의 특징은 기사도 나, 손님도 나.
그렇다.
나는 또 과몰입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바질 싹이 둘 난 걸 보고 출근했다.
학교에 있는데 오전 10시부터 안전 문자가 왔다.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었다.
퇴근 시간이 되니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택시 기사님에 빙의해서 얼른 차를 몰았다.
2. 새싹 세 송이의 반란
우당탕 집에 와서 분무기를 챙겨 베란다로 가 보았다.
그리고 세상에!
조금 떨어진 곳에 삐죽, 작은 싹이 하나 더 나와있었다.
촥촥촥촥
나는 분무기로 열심히 세 새싹에게 물을 줬다.
사생팬답게 인증샷도 찍었다.
사진마다 물방울이 올망졸망 가득히 같이 찍혔다.
방울방울 다 저 작은 잎과 뿌리에 닿았으면 좋겠다.
'아, 이게 바로 농부의 마음인가...'
손톱보다 작은 싹 몇 개에,
나는 농사짓는 마음까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3. '어진 농부의 아들' 그리고 오자
문득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의 별명이 기억나,
분무기를 손에 든 채 웃음이 터졌다.
웃음소리가 초록 싹 위, 물방울을 지나
11층 베란다 밖까지 흘러 나갔다. 하늘이 참 파랬다.
고등학교 시절, 체육 선생님은 유독 깡마르고 검게 타셨다.
피부가 원래 검은 편이 아닌, 딱 밭일하다가 햇빛에 그을린 톤이셨다.
뭔가 새참도 드시고, 막걸리도 드실 듯한 농사톤.
누군가 '어진 농부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듣자마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왜 아들이냐고 물어도 서로 등짝을 때리며 웃을 뿐.
아마도 K-여고생들의 당돌함을 이길 수 있는 건 얼마 없을 것이다.
당시 사회 문화 선생님은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셨다.
매사에 깐깐하시고, 엄청난 달변이셨다.
그 능력을 잔소리하는 것에 쓰시곤 했다.
오 씨인 데다 허리가 구부정했던 그 선생님의 별명은 '오자'가 되었다.
ㅇ자 앞에 생략된 단어를 설명하는 건,
우리 순진한 바질 새싹이 있으므로 안될 일이다.
4. 할매의 탄생
그런가 하면 '할매' 선생님도 계셨다.
문제는 고등학교 때 내 별명도 '할매'였다는 점이다.
몇 번 '벚꽃장 가자', '색이 참 곱다' 입을 잘 못 놀린 대가로
나는 여고생 시절을 할매로 살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별명이 좋았다.
"야, 니 할매라더니 욕하는 솜씨가 남다르네."
친구들 앞에 세 보였기 때문이다.
할매 선생님과는 어느 날 운명처럼 본관과 별관 구름다리에서 만났다.
"할매는 낸데, 니가 와 할매고."
선생님은 친구들이 "할매!" 하고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셨다.
조용히 미친 자였던 나는 공손하게 선생님께 두 손바닥을 편 뒤,
내 실내화를 가리켰다.
당시 나는 할매 아이덴티티에 부합하기 위해 갈색털이 달린 검은색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이거는 머꼬." 결국 할매 선생님이 웃어주셨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배꼽 인사를 드리고,
혼나기 전에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친구들이 옆에서 또 등짝을 때리며 웃었다.
"니 진짜 도라이가!"
"할매 이거 미쳤나 봐. 그걸 왜 보여드리노."
물론 괜히 혼날까 봐 같이 뛰다시피 도망가는 중이었다.
5. 수학이라는 낭떠러지
이리저리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실은 마음 한구석엔 우울감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수학공부 때문에 늘 우울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 성장통이었으리라.
인생 처음으로, 내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어진 농부의 아들' 선생님 시간에는 체육 부장으로 혼이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몸치였던 날 왜 체육 부장을 시켰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오자' 선생님 시간에 NIMBY, PIMFY 같은 용어가 뭔지 술술 분 적이 있었다.
당시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하여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했었는데,
친구들과 울며 나오는 날 보고 "님비야, 울지 마라." 하셨다. 나름의 칭찬이셨다.
6. 왕서방의 일침 "할매, 그거 아이다"
꾸중도, 칭찬도 그저 큰 의미가 없었고 수학만이 나의 근심이자 기쁨이었다.
콧수염이 절묘하게 나서 별명이 '왕서방'이었던 수학 선생님은 나만 보면
"할매"하고 못마땅해하셨다.
윤 씨였던 수학선생님은 팬이 많았는데, 나는 가끔 "윤서방"이라고 불렀다.
그의 팬인 친구들이 모두 질색하면 뿌듯했다.
노력하면, 내 최선을 다하면 뭔가 되리라 믿어왔던 나의 믿음은
왕서방 선생님 시간만 되면 여지없이 무너졌다.
수학 공부하는 시간이 좋으면서도 참 외로웠다.
거대한 지식의 세계 앞에 서는 건, 언제나 외롭고 두려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나의 부족함도, 실패도 내 모습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나는 거대하고 좁은 성장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여린 바질 새싹 같던 내 마음도 능력 부족이라는 생채기 앞에서
조금씩 진한 초록이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7. 여름의 문을 통과하며
촥촥촥
신통방통하게 고개를 내민 바질 새싹들에게 물을 듬뿍 주었다.
원래는 6월이 재배 시기라는데 7월의 폭염을 이겨낼지 걱정이 됐다.
'할 수 있어. 너희는 이미 예선 통과자야.'
포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에 져도, 수학 성적이 안 나와도,
시작했으면 완주해 보자.
거기에 냉소주의자는 낄 수 없다.
우리는 같이 여름의 뜨겁고 좁은 문을 지나고 있었다.
[오늘의 바질 한 마디]
"하루 한 뼘씩 초록해지고 있다.
당신도, 나도.
단, 한 뼘은 씨앗 기준."
[브런치북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의 2편,「화분계의 명당을 찾아서」가 다음 모바일 메인 페이지에 짧게 소개되었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