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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록은 왜 늘 먼저 시드는가

[결승 진출자 발표] 탈락자 명단 공개

by 시트러스

1. 퇴장 선수 발생

개똥이가 쓰러졌다.

어제는 유난히 뜨거운 햇살이 굵은우처럼 쏟아진 하루였다.

폭염 속 작은 싹들이 걱정되어 베란다를 들락거렸지만,

저녁까지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아침에 나가보니 그새 개똥이는 허리가 꺾여

화분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검색해 보니, 생장점이 죽은 상태.

가위를 들고 와 쪼그려 앉았다.

'그냥 둘까...' 잠시 망설였지만,

흙속에서 썩으면 곰팡이나 병원균이 생길 수도 있었다.

최대한 지면 가까이 가위날을 내려 '싹둑' 잘라냈다.

나오려고 돌아서니,

베란다 창문에 양손을 붙이고 서 있던 두희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곧장 내 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2. 손에 남은 작별

한 손에는 가위, 다른 손에는 잘린 새싹.

"어? 그거, 뿌셨어요?"

"두희야, 이런 건 잘랐다고... 아니, 그게."


"세희야! 엄마가 이거 뿌셔.. 잘랐대!"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소리쳐 불렀다.

발로 베란다 문을 대충 열고 나오는데,

날 보는 두 쌍의 눈초리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세희야, 두희야. 새싹이 시들어서 엄마가 잘라줬어."

"왜 시들어요?"

"글쎄... 어떤 싹들은 시들기도 하나 봐."

동그란 머리 둘이 내 손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작다."

"그러게. 너무 작다. 음... 우리 안녕할까?"

"... 안녕."


"만져 볼래요."

손바닥 위로 조심조심, 두희가 싹을 집었다.

"안녕." 아이가 조그맣게 내쉰 숨결에 싹이 살짝 흔들렸다.


3. 어떤 초록은 먼저 시든다

어떤 싹은 먼저 시든다.

떡잎 속 인연을 펼쳐 보기 전에 떠나기도 한다.


다시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남은 칠성이, 언년이에게 물을 주었다.

용병단 자말, 로베르토, 샨티의 화분 흙은 아직 습기가 남아 있어 주지 않았다.

과습과 직광, 바질에게 해로운 환경을 다시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분무기 물이 엇박으로 갈렸다.

물줄기와 함께 마음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작고 여린 것 앞에서 자주 무력해진다.

문득, 운전을 처음 시작할 때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4. 박치, 길치, 몸치의 운전 연대기

처음 운전을 배울 때는 과연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나.

똥손만큼 몸도, 그냥 대중교통에 봉인해야 하나 싶었다.

이 몸은 남부럽지 않게 빠짐없이 서툴렀다.

주차하다 사이드 미러를 박고(몸치),

끼어들기 다급히 하고(박치),

목적지까지 0km 남았다는데 여기가 어디지(길치).

우리 집 새싹 언년이가 운전을 시작해도 나보다는 잘할 것이다.


하지만, 운전은 역시 구력.

은평구에서 노원구까지. 매일 30킬로씩 왕복 60킬로를 출퇴근했더니 용병단 로베르토 키만큼은 실력이 늘었다.


왼팔은 창틀에, 오른손은 핸들에.

이 자세만 마스터하면 어쩐지 ‘운잘알’이 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익숙한 자세로 제법 여유 있게 다니게 된 무렵이었다.


5. 스쳐 가는 생명 앞에서

어느 날 출근길 도로에 작은 형체 하나가 누워 있는 걸 봤다.

뭔지도 모르면서 벌써 마음 한 구석과 코가 뜨끈해져 왔다.

아니었으면 했지만, 스쳐 가며 본 것은 작은 고양이.

이미 움직임이 없었다.

작은 생명들이 스러진 현장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 수습해 줄 능력도 없어서,

마지막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시야가 뿌옇게 되도록 바라보는 것이 나름의 애도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좋은 곳으로 가렴.’


6. 초록은 왜 늘 먼저 시드는가

작고 여린 초록의 존재들은 쉽게 지친다.

순수한 생명들은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우리를 떠나기도 한다.

운전을 시작하고 처음 그 장면을 본 뒤로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작은 생명의 소멸은

잠시나마 늘 심장을 꽉 쥐었다 놓는다.


가는 줄기 끝 바질 싹 하나, 연약한 고양이 한 마리.

그들이 곁을 떠나갈 때마다

내 작은 우주는 잠시 기우뚱한다.

7. 대회는 계속된다.

천하제일 바질 키우기 대회는 계속된다.

싹이 나면 시들기도 하는 것이 생명의 순환임을 안다.

하지만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남은 생명도 순환시키는 방법임을 역시 안다.


대회를 속행한다. 개똥이, 언년이는 후보 선수.

용병단은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오늘의 바질 한 마디]

"알비다.(Alvida)"

"차오.(Ciao)"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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