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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석 May 31. 2024

내 나이 18살. 30억이 증발했다.

2001년 9월 11일

비극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아버지는 나름 업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셨다고 한다. 적자인 상태인 회사를 흑자전환 시키셨고, 초고속 승진으로 이사 직함을 다셨다. 그런 아버지가 아프시기 시작하자 회사에서는 아버지에게 무기한 휴가를 내주었다.


우리 가족 3명은 아버지의 요양차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시드니의 Balmain이라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아름다운 호수 뷰를 가지고 있는 집을 장기 렌트했다. 집 앞에 호수에는 요트를 댈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날이 좋은 날에 요트를 타고 호수로 나가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보였다. 거주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영장과 헬스장, 사우나도 딸려 있었다. 저녁 무렵의 낙조는 환상적이게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곳에 다시 가서 살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옆집에서 요트 타고 다니는 부촌이었다.


하지만 좋은 집이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나와 어머니는 랭귀지 스쿨에 다녔지만 아버지는 외부 활동을 거부하고 하루종일 집에서 TV만 보셨다. 당시엔 해외에서 한국 방송을 보려면 한인타운에서 녹화된 비디오를 대여해서 보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갈 때마다 잔뜩 대여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증 환자를 호수가 보이는 집에 혼자 내버려 두고 가족들이 밖에 돌아다녀서는 안 되었지만, 당시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희망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었다. 아버지의 정신질환이 그렇게 25년을 지속될지.


아버지는 많이 괴로우셨는지 결국 몇 개월을 채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와 나를 호주에 남긴 채 한국으로 먼저 귀국하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 역시 10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난 영어도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호주 생활도 잘 적응하고 있어 남겠다 했지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히 돌아왔었어야 했다. 가족이 힘든 시기에는 철들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게다가 호주에 있었을 때 사진을 보면 나라도 아이를 강제소환하고도 남았을 거 같다.


17살. 염색하고 담배 피우던 시절




1년 유급을 하고 고등학교 1학년에 복귀했다.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 첫날 반 배정을 받아보니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같이 유급해서 앉아있는 것이었다. 싸움으로 동네에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친구였는데 담임 선생님은 나를 그 친구 옆에 앉게 하셨다. 우리 둘은 가까이 지내며 하교할 때 아파트 구석에 숨어 같이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 친구의 입장에서는 내가 싸움은 못하지만 착했고, 중학교 3학년을 같이한 세월이 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친구는 결국 1년을 못 버티고 중간에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난 그 이후로 완전히 학교생활 적응에 실패했다. 한 살 어린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한 학년 위 동갑인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해 나만의 벽을 세우고 음악 몰두했다. 아버지가 아프시니 항상 집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음악에서 찾았던 거 같다.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예체능으로 실용음악과를 가겠다고 하며 학원을 등록해 드럼 연습과 화성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흔들리던 가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일어나니 TV에서 난리가 나 있었다.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에 부딪혀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중계되고 있었다.


'뭐지.. 영화인가?'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바다 건너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911 테러는 우리 가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식 파생상품으로 하루 만에 30억의 돈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본인이 아프셨기 때문에 무리한 투자를 감행하셨던 거 같다. 벌어놓은 돈은 있지만 이 돈으로 평생을 살기 위해선 투자로 돈을 불렸어야 했는데, 마침 친척 중 한 명이 교보증권 선물옵션 팀장이었다. 아버지는 시험 삼아 돈을 맡겨보았고, 운용을 몇 개월간 잘하는 걸 보시더니 모든 걸 팔아서 전재산을 맡겨버리셨다. 금융지식이 전무하여 무리한 투자인 줄 모르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파생상품의 특성을 잘 알고 있고, 운용에 겸손한 전문가라면 고객의 무리한 투자를 거절해야겠지만, 당시엔 그렇게 진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나 보다. 그렇게 아버지가 평생을 모아 왔던 전재산은 정말 말 그대로 하루 만에 증발해 버렸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혹자는 그 경험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말한다. 하지만 그 실패는 감당 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운이 좋아 큰 베팅에서 한 번은 성공할 수 있지만, 그 경험으로 비슷한 모험을 계속한다면 언젠간 큰 실패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패는 본인과 주변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은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할 때 항상 최악을 생각하게 하는 습관을 만들어 주었다.


인생이라는 게 참 불공평한 것 같다. 평생을 노력해서 커리어와 재산을 쌓아 왔어도 한 순간에 한 번의 방심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린 살면서 항상 경계하고 긴장한 채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난 아버지의 건강과 커리어, 자산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고3을 맞이하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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