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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석 May 17. 2024

초등학교 6학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행복한 아이로 키우는 방법은 결국 나에게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초등학교 친구들이었다. 오랜 친구들일 수록 경조사 때 본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지난번 모였을 때는 다른 친구의 결혼식이었는데 말이다.


초등학교 동창 7명이 있는 단톡방이 있다. 몇 번을 완전체로 모이자고 하고 한두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아도 항상 한두 명은 빠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모두 같은 자리에 모이다니. 친구들은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내 얼굴에 너무 큰 허망함이 보였나 보다. 눈물을 닦고 표정을 고치려 애를 썼다. 친구들이 향을 피우고 동시에 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얘들 기억 나나? 내 초등학교 친구들이다’


아빠가 좋은 친구들을 두었구나 하고 좋아할 것 같았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때 과천에서 서울의 서초동으로 이사를 했다. 우성아파트 18동. 지금은 재건축이 된 래미안 서초 에스티지 S. 아마 그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 까지가 내 인생에서 가장 우여곡절 없는 시기였던 것 같다. 아버지도 그랬을까. 계산해 보니 부모님이 30대 후반이었던 시절이니 지금의 나보다 두어 살 젊은 나이이다. 나도 그때의 아버지도 흔히 말하는 ‘한창 일할 때’라는 시기.


우린 왜 이 시절이 이토록 불안할까. 별일이 없다면 아직 한창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테고, 직장생활을 10여 년 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꽤 안정된 시기인데 말이다.


사람이란 게 이쯤 되면 알만큼 알기 때문에 계산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나의 인생 전부를 베팅할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나이. 소득이 언제까지 이렇게 유지될 수도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이를 양육하고 본인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초조한 불안감을 가지는 시기. 아이는 행복하게 뛰어놀지만 막상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이 많을 시기일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그때 불안하셨을까. 새삼 지금에 와서 물어보고 싶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인생 통틀어 경험하고 계신 가장 행복한 현재를 온전히 누리셨으면 좋겠다. 어느 정도 안정된 경제적 여건에 감사하고, 사랑스럽게 노는 아이를 보며 가족끼리 웃는 순간들을 온전하게 느끼셨으면 좋겠다. 이 순간마저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우리의 시간은 결코 행복으로 채워질 수 없을 테니까. 현재의 순간에 집중한다면 삶 구석구석에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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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한 하루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초등학교 친구들 중 어머니도 잘 아시는 이준석이라는 친구가 있다. 처음 전학을 간 날 담임 선생님은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이 친구를 소개해줬다. 준석이는 우리 집 앞동인 17동에 살았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우린 주말을 포함해서 거의 매일을 같이 보냈고, 부모님들끼리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운동을 싫어하고 먹는 것을 좋아해서 둘 다 비만이었는데 친구들은 항상 붙어 다니는 우리를 나는 흑돼지, 준석이는 백돼지라고 불렀다.


반면 학교 성적은 전혀 달랐다. 나는 40명의 학급에서 항상 35등 내외를 유지했고 준석이는 5등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했다. 어머니는 준석이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부럽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공부 잘하는 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진심으로 부러워하셨다. 그런데 그게 바뀌어버렸던 사건이 있었다.


부모님들은 비만인 우리를 어떻게든 운동을 시키기 위해 집 근처 코오롱 스포렉스에서 운동을 시켰다. 그중 주말에 진행되는 농구 수업이 있었다. 달리기를 심하게 시켜서 정말 싫어했던 시간이었다.


어느 날 나는 가족 모임에서 짜장면을 배 터지게 먹고 수업에 갔다. 이상하게 소화불량인지 그날따라 너무 힘들었다. 그 와중에 달리기를 하는데 왼쪽 머리가 갑자기 찌릿하고 따갑게 아팠다.


이상해서 달리기를 멈추고 걷기 시작하니 선생님이 날 불러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머리가 아프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발음이 되지 않고 '어어어'라는 소리가 입에서 맴돌았다. 농구 선생님은 날 보더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앉아서 쉬라고 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근데 계속 말이 나오지 않아 소파에 누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눈치를 보며 얘기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어머니도 어느 순간 이상한 걸 알아차렸는지 이것저것 나에게 물어봤다. 말이 안나오냐는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많이 당황하셔서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기 시작했다. 주말에도 일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알리고, 순천향대학교 병원 의사이셨던 준석이네 어머니에게도 전화를 했다. 그리고 바로 준석이 어머니의 차를 타고 순천향대학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그날 먹은 짜장면을 다 토해버렸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그때가 너무 죄송했다고 말씀하신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누워 있으니 아버지도 곧 병원에 도착하셨다. 사실 잠들다 깨다를 반복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정신이 들 때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별로 아프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계속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근데 역시 발음이 되지 않아 "아아아" 소리만 나왔고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잠들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은 '괜찮아'라는 단어가 들렸으면 더 마음이 아팠을 수도 있겠다. 뇌졸중인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부모를 안심시키려 괜찮다고 하려 하다니.


난 곧 가족과 함께 앰뷸런스에 태워져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했을 때 내가 걷지 못해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었던 순간의 그 등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평생에 걸쳐 아버지를 가장 강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순간이다.


서울대학교는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의료기기를 연구하시다 회사를 옮겨 의료기기를 영업하셨기에 서울대병원에 정말 많은 지인들이 있으셨다. 아마 그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쓰고 있던 의료기기들도 아버지가 판매하셨던 장비였을 게다. 그래서 이례적인 특혜를 받았다. 아버지의 지인분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퇴근 따윈 없는 사람들처럼 밤 낮 새벽을 가리지 않고 나의 뇌를 MRI로 촬영해 주셨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MRI에서 자다 일어나니 토요일 새벽 5시.


이 글을 빌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버지도 그들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 단순하게 하고 사라지는 행위가 아니라, 도움받은 사람의 평생에 소중하게 보관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3주 정도 뒤, 이렇다 할 치료를 받지도 않았지만 기적과도 같이 퇴원할 수 있었다. 담당 교수님은 내 나이가 어린 덕분인지, 터진 혈관 주변의 모세혈관들이 터진 혈관을 대신해 피를 통하게 했다고 하시며 이런 케이스가 없다며 신기해하셨다. 물론 건강검진으로 MRI 촬영을 하면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기는 하다.


후유증이라고 한다면 지금도 발음이 완전히 명확하지가 않고 조금 새는 느낌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말투가 조금 어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녹음된 걸 들을 때면 매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큰 질환에 겪고도 이렇게 건강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그 이후로 부모님은 나의 성적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내가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 성적은 고등학교 3학년 초까지 꾸준하게 최하위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와인을 마시며 대화하는 것을 매우 즐기는데,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 어떻게 크면 좋을지에 대한 바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돈에 집착하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 몸과 마음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 머리가 좋기보다는 현명했으면 좋겠다.

-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 밝고 쾌활하고 긍정적이었으면 좋겠다.

- 현재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 삶을 여행하듯 즐겼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부모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와 비교해서 공부를 더 잘한다거나, 더 좋은 대학을 간다거나, 더 있어 보이고 연봉이 높은 직장을 가지거나 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단순하게도 사랑하는 아이들이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바람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더 많은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점수를 통해 합격 불합격을 경험한다. 현재의 소중함 대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을 배우고 '성공한 인생'이라는 뭔가 명확하지 않은 목표를 찾기 위해 방황한다.


6개월간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가 우리의 원래의 바람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봤다.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은 결국 나에게 있었다.


아이가 긍정적 관점으로 삶을 여행하듯 즐기길 바란다면 내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부귀영화를 좇기보다 높은 자존감으로 인생을 즐기길 바란다면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몸과 마음을 항상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아이도 본인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보다 스펀지 같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도록 부모가 그런 모습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사회와 가정에서 바라는 나의 역할을 만족시키면서도 저렇게 살 수 있어야 하다니.


어른노릇이란 정말 힘든 일이다.




어머니에게 준석이가 왔다고 알렸다. 어머니도 준석이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와도 30년 지기구나. 우리가 만난 지 벌써 30년이 되었다니. 앞으로 30년 동안 우린 어떤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까.


나중에 부의금을 정리하면서 보았는데, 치과도 잘 안 돼서 적자라더니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넣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 친구의 심정을 알기에 나중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조만간 함께 좋은 술을 마셔야겠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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